1997년 11월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벌써 9년이 되어 간다. 한국 경제는 어느 면을 보든지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위기 이전 7~8% 수준이었던 경제성장률의 평균치는 위기 이후 5%대로 내려왔다.
과거 3%를 밑돌던 실업률은 이제 좀처럼 3.5%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지표로 측정하든 소득분배도 위기를 계기로 악화된 뒤 이전 수준으로 회복될 조짐이 없다. 분명히 외환위기와 그로 인해 촉발된 경제위기는 한국 경제의 전환점이었다.
그런데 위기 이전으로 복귀한 것이 있다. 환율이다. 지난 금요일 외환시장에서 원ㆍ달러 환율은 953원, 원ㆍ엔 환율은 809원을 기록하였다. 외환위기 전야인 97년 10월 말의 환율수준이다. 위기 직후 한 때 원ㆍ달러 환율이 2,000원에 육박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극적인 반락이다.
환율의 하락은 우리의 대외구매력이 그만큼 증가하는 것을 뜻하므로 다른 문제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반길 일이기도 하다. 9년에 걸친 환율의 대장정은 무엇을 말하는가?
외환위기가 발생한 뒤 국내외 학계에서는 우리의 외환위기가 ‘지불불능 위기’인지 아니면 ‘유동성 위기’인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전자의 견해는 경제에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있었기에 위기가 야기되었다는 것이고, 후자는 그렇게 나쁜 상태가 아니었는데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성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다는 주장이었다.
지불불능 위기론에도 여러 부류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돌아볼 때 흥미로운 것은 ‘중국 추격론’이다. 중국은 80년대 말 경제를 개방하고 90년대 본격 성장궤도에 진입한다. 이로 인해 한국은 선진국을 추격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중국의 추격으로 국제경쟁력을 상실하는 부문이 늘어가고 있다는 주장이 90년대 중반 제기되었다.
한국 경제가 국제경쟁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면 원화가치는 그에 비례하여 하락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당시 사실상의 고정환율제였던 우리의 환율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있었다. 중국 추격론자들은 이 때문에 외환위기 이전 우리의 환율수준은 국제경쟁력에 비해 너무 낮은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적정 환율은 900원 내외가 아니라 1000원이 훨씬 넘는 수준이었고, 외환위기는 이 같은 환율의 불균형을 바로 잡는 과정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외환위기 논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해야겠지만, 더욱 많은 지지를 받은 것은 지불불능 위기론보다는 유동성 위기론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런저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위기 직전 환율이 과도하게 낮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의견이었다. 과연 위기 이후 98년 하반기부터 최근까지 원화의 환율은 꾸준히 하락하여 왔다. 그리고 9년이 걸렸지만 이제 위기 발발 이전의 그 자리에 되돌아와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돌아온 순간 오히려 우리는 예전 쉽게 기각하였던 ‘중국 추격론’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지난 9년 매년 9%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중국 경제의 질주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가 성장동력으로 자랑해 온 철강, 화학산업의 수출증가율이 작년 하반기부터 답보 상태이다. 중소기업의 어려움, 저기술 노동자와 고기술 노동자 간 임금 격차의 증대 등이 중국 경제의 성장과 무관하다고 단언하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90년대 중반 제기된 중국 경제 추격론이 나날이 현실성을 더해가고 있다. 당연히 9년 전의 질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경제의 경쟁력에 비하여 환율이 너무 내려온 것인가? 아직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도 답이 변하지 않을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생산성의 증대와 성장의 지속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국민경제의 대외 구매력, 즉 실질소득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신인석 KDI 거시경제연구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