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문화와 만나는 우리옷 전시회
“어쩌면 색깔이 이렇게 고울까요? 서양 물감으로는 도저히 이 느낌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화려한 듯 편안하고, 수줍은 듯 하면서 무게를 잃지 않고 있어요. 이게 바로 우리의 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한국일보사 주최로 25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02-3434-2000)에서 열리는 이색 한복 이벤트 ‘韓류, 한복을 입다’ 전시회. 휴일이 아닌 식목일인데도 불구하고 삼삼오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한복의 아름다움, 특히 색과 선에 매료됐다.
작은 의류 제조업체를 한다는 임미영씨(40)는 “한복의 색과 선에서 새 제품의 아이디어를 얻을까 해서 찾았는데 소득이 있었다”며 “이미 영화와 방송을 통해 대중들에게 친숙해졌기 때문에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경쟁력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임씨는 전시회의 의도를 정확히 짚은 듯하다. 행사는 바로 우리 대중문화의 성가와 함께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한복의 위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어 중남미까지 한류 열풍을 실어 나르고 있는 드라마 ‘대장금’을 필두로 국내에서 인기를 얻었던 영화 ‘왕의 남자’,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음란서생’, 드라마 ‘서동요’, ‘궁’ 등등. 아름다운 우리 영상물은 모두 한복으로 더욱 아름다워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리의 가장 고유한 전통 문화 코드를 세계화의 기준으로 세련되게 가공하고 이것을 산업과 기업으로 연결시키자는 것이 바로 이 행사의 기획 의도이다.
전시회는 복합 문화 행사의 성격으로 진행된다. 전시 관계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21세기 한복의 발칙하고 신나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처음 얼굴을 대하는 전시관은 스타 존.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 이영애가 주인공이다. 각종 해외 영화제와 국제 행사에서 이영애가 입었던 한복 두 벌이 관람객을 맞는 옆으로 사진작가 조세현씨가 촬영한 한복사진 25점이 전시되어 있다.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이영애의 맵시 등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한복의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사진들이다.
드라마&무비 존이 이어진다. 각종 영상물을 통해 우리가 봤던 한복이 대거 전시된다. 그냥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대장금’의 수랏간, ‘왕의 남자’의 왕의 침전, ‘음란서생’의 내전 등 작품 속의 무대를 재현했다. 특히 ‘음란서생’의 세트는 왕과 왕비의 옆으로 도열한 내시들의 가슴에 LCD를 부착해 계속 영화의 내용을 보여주는 일종의 설치미술 작품으로 연출됐다.
젊은이들 가장 좋아하는 곳은 한류한복 체험관. 영화와 드라마에 썼던 50여벌의 한복이 대형 대나무 옷걸이에 장식되어 있는 공간을 지나면 ‘왕의 남자’의 왕의 처소, ‘궁’의 황태자 부부의 내전이 나온다.
관람객들이 사진 촬영과 한복 입어보기 체험을 하는 곳이다. 학교을 일찍 마친 학생들과 연인들이 서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여자 친구와 함께 왔다는 대학생 조기형씨(22)는 “평소 여자친구와 예쁜 한복사진을 함께 찍는 게 꿈이었는데 소원을 이뤘다”며 “컴퓨터와 전화기의 바탕화면용으로 딱”이라고 즐거워했다.
전시는 작가 존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의상을 담당했던 무형문화재 침선장 보조자 구혜자씨의 작품 20벌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주인공 배용준이 입었던 옷도 있다. 차분하고 무게 있는 전통 한복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명품 한복 디자이너인 김영석씨도 작품 30점을 내놨다. 선인들이 사용한 물건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는 김영석씨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장신구도 전시했다. 비녀와 뒤꽃이, 노리개 등 한복과 관련한 장신구와 조각보 목가구 등이 나왔다.
1,000여 개의 베갯모를 이어서 만든 전시물이 눈길을 끈다. 벽의 일부를 아예 막아놓은 듯한 이 대형 전시물은 특히 외국인들에게 인기다. 카메라 플래시가 계속 터진다.
한복과 장신구 외에 가구도 눈 여겨 볼만 하다. 드라마 ‘궁’에 고가의 가구와 소품을 협찬했던 ㈜진하스는 촬영 당시의 소품 그대로 이번 전시회의 세트를 꾸몄다. 크리스탈, 자개, 그림으로 꾸며진 동ㆍ서 퓨전스타일로 드라마 방영 당시에 큰 화제가 됐었다.
‘韓류, 한복을 입다’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가 끝나면 장소를 옮겨 계속 연장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 이렇게 준비했다
‘韓류, 한복을 입다’는 한복과 전시 분야의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의 힘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복의 강한 매력에 이끌리고, 그래서 세계화가 가능한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확신이 밤샘 작업도 힘들지 않게 했다. 기획하고, 작품을 만들고, 전시 공간을 꾸민 4명의 명인들로부터 이번 전시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박희수 기획자
“이젠 외국인들이 한국보다 오히려 한복을 더 잘 알지 않을까요?” 전시 기획자 박희수(45)씨의 이야기이다. ‘한복을 통해 한류를 흡수한다’는 그의 이론에 딱 맞는 발언이다. 대체 한복을 얼마나 사랑하기에. 1995년부터 한복 칼럼리스트로 활동해온 그는 대중을 흡수하는 한복 전시를 오래 전부터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 분야에서는 알아주는 ‘쟁이’들만 모아 급기야 사건을 벌였다.
일단 아이디어 자체를 기존의 한복 전시회와는 180도 달리했다. 21세기적 영감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패션이란 장르를 드라마와 영화 속 소품들과 연결해 이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체험하도록 구성했다. ‘한복의 재발견’전인 셈이다.
“결국 이번 전시에서는 한 공간에서 한복의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현재를, 영화 속에서는 과거를, 디자이너들이 새로 제작한 한복 전시관에서는 한복의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요.”
고루함과 구태의연함, 도태된 전통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깨고 한복은 또 하나의 명품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게 박씨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최대한 친근하고 우아하게 손질해봤다. 명인들의 손끝으로 재연된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인도 느끼지 못했던 한복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법하다.
“정말 원 없이 일했어요. 힘들었지만 한복에 미쳐 각자 최선을 다했고 그것을 진심으로 느껴주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지요. 일하면서 더 깊이 한복에 빠져들게 됐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열정이 있었기에 프로답게 ‘쟁이’들은 작업에 몰두했다. 그래서 이뤄낼 수 있었다. 박희수씨는 전시에 참여한 50여 명의 팀원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대중적인 즐거움과 고급 문화에 대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전시가 될 겁니다. 일단 한번 와보시라니까요.” 그는 자신만만했다.
▦ 유용범 아트 디렉터
유용범(52)씨는 이번 전시장을 "의식주를 한번에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양반집 안방이나 궁 등이 곳곳에 펼쳐져 있고 갖가지 한복을 구경할 뿐 아니라 입어볼 수도 있고 전시장 한 켠에서는 전통차와 떡, 한과도 맛 볼 수 있다. 드라마와 영화 세트장도 겹치는 부분은 제거하고 각각 다른 컨셉만 잡아 만들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한복에 맞는 드라마 속 분장체험도 해주고 한복 입는 법과 절하는 법 등 예절교육도 원하면 받을 수 있다. 4월 중순에는 작가 존에서 미스 코리아를 초청해 한복쇼도 성대하게 치를 계획이다.
"움직이는 한복쇼에요. 그냥 걸어놓는 전시는 이제 재미없잖아요. 시각적으로 자극이 있어야지요."
학생이나 외국인들은 한복을 직접 빌려 입고 세트장에서 촬영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영화 속의 주인공이나 된 듯. "눈으로 즐기는 것도 좋지만 직접 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겁니다. 제대로 된 한복 한번을 안 입어 본 한국 사람들도 많을 걸요?"
유용범씨는 단청이나 한복 등 세트와 제작품, 소품 곳곳에 스민 오방색의 조화로운 아름다움도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채도가 높은 '우리 진짜색'을 볼 수 있는 기회.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컨텐츠를 계속 개발해서 걸어다니는 한복쇼를 지속적으로 갖고 싶어요." 이번 전시의 일환으로 5월13일 오후5시 남이섬에서 한복 패션쇼가 개최될 계획이다.
▦ 김영석 한복 디자이너(자칭 한복 아저씨)
작가 존 벽 한 면에 쌓인 형형색색의 베갯모 1,000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베고 자던 것이 화려하고 거대한 작품으로 변해 있었다.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43)씨가 만든 '쉼(Rest)'이다. 머릿 속의 생각을 베개에 덜어버린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그는 현대적인 색감이 돋보이는 한복 20여벌과 노리개와 대형 조각보, 비녀와 떨잠 등 고가 장신구들도 내놓았다.
"저는 한복 디자이너가 아니에요. 한복을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니니까. 그저 선인들이 사용한 물건 하나하나에서 영감을 얻어, 전통을 재해석했을 뿐이죠. 그러니까 그냥 '한복 아저씨'라고 불러주세요."
그는 일본에서 음향 연출을 전공하고 이벤트 기획을 담당하다 30대초반, 바느질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노리개, 뒤꽂이 등 오래된 물건 모으기가 취미였던 그는 헌 물건들을 고쳐 새것보다 빛나게 만드는 재미에 흠뻑 빠져 버렸다. 이렇게 시작된 바느질을 인연으로 한복 디자이너가 돼 버린 김씨는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 7년 만에 명품 한복 디자이너 반열에 올랐다. 그 특유의 현대적인 감각이 키워드였다.
그는 한복의 최고 킹쩜?'우아함'으로 꼽았다. 바로 감춰진 미학. 그는 "가려진 가운데 살짝 보이는 실루엣에서 느껴지는 섹시함이야말로 예술"이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한복 외에도 70~80년 된 방석을 손질해 만든 절제된 듯 화려한 의자 시리즈와 100년이 넘은 전국 팔도의상 등을 볼 수 있다.
▦ 고명철 세트 디자이너
한복을 그냥 벽에 붙이는 밋밋한 전시가 아니라 전시장을 사극과 영화세트로 재현해 입체적인 전시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운 세트 디자이너 고명철씨(34), 그는 전시 오픈 전 1주일간 밤샘 작업을 해야 했다.
처음 '대장금'의 수라간 들어서기 직전 성곽 들어가는 문을 표현한 아치부터 눈 여겨 보자. 그가 화강암 무늬를 직접 그려넣었다. 세트에 직접 그리고 단청무늬를 종이로 붙이는 작업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특히 '왕의 남자' 세트는 옛날 궁의 느낌을 고스란히 살려야 하니 섬세한 작업이 필요했다.
한복 전시 세트장인 만큼 핵심이 죽지 않도록 세트를 최대한 단순화 시키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궁' 세트의 경우 뼈대는 고전적이면서도 벽면은 현대적이라 이를 접목시켜 색감을 맞추는 데도 힘들었다. "말하다 보니 온통 힘들었던 것 투성이네요. 그러니까 세트 곳곳을 놓치지 말고 봐주세요. 땀이 서린 작업들이니까요."
'대장금' 세트는 뒷편에 대나무 숲과 어우러져 이색적인 분위기를 내고, '음란서생'은 한복의 모더니티와 화려함을 한껏 보여준 무대 의상 디자이너 정경희씨의 작품과 설치미술 작가인 남편 오만호씨의 합작품. 그만으로 설치 작품이 돼버렸다.
한복과 어우러진 드라마와 영화 세트장, 전시장에서 거북살 문살과 단청, 벽면, 기둥, 지붕까지도 의식적으로 함께 눈여겨보자. 그의 예리한 손끝의 힘이 느껴지는 듯했다
조윤정기자 yjcho@hk.co.kr
■ 스타들의 명품한복 한자리에
‘韓류, 한복을 입다’ 전시회는 크게 3가지 구역(zone)으로 나뉘어진다. 드라마&무비 존, 한류한복 체험관, 작가 존이다. 약간씩 분위기가 다르다.
드라마&무비 존은 이영애의 한복으로 시작한다. 색깔에 특히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한다. 우리 옷의 색 어울림을 파악하는 것은 다름아닌 큰 공부이다. 색에 대해 무딘 관람객이라면 그냥 한참 바라보기만 해도 안목이 높아질 것이다.
전시 기법의 한계 상 실제 사람이 아닌 마네킹이 옷을 입었다. 무심코 훑어보지 말고 상상의 나래를 펴자. 이미 다 아는 내용의 드라마와 영화이다. 세트를 그 작품의 한 장면으로 머리 속에서 바꾸면 재미가 두 배가 될 것이다.
한류한복 체험관은 말 그대로 후회 없이 체험하는 장. 입어보고 사진을 찍는 곳이다.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다. 이 기회에 한복을 정확하게 입는 법도 배워보자.
작가 존은 명인들의 정성으로 꾸며진 곳. 바느질 한 땀 한 땀에도 정신을 집중해 본다. 우리 의복 문화, 장신구 문화의 예술성을 평가할 수 있는 시야가 기를 수 있을 것이다.
** 입장료: 어른 8,000원, 청소년ㆍ단체 6,000원,
** 예매:테켓링크 1588-7890
** 문의(02)724-2770, 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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