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야든 정상에 오르는 것은 끔찍한 고통을 요구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한때 정상에 올랐다가 이젠 평지로 내려와 ‘좋았던 옛 시절’을 음미하며 원로 행세를 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반평생 동안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며 새로운 업적들을 내놓는 ‘영원한 현역’은 찾아보기 힘들다. 만화가 허영만(59)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무려 30년 동안 자신의 분야에서 현역 베스트셀러 작가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다. 혀를 내두룰만한 대기록이다.
정상에 서 있는 사람에겐 달리 경쟁할 사람이 없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과 싸울 뿐이다. 허영만의 작업 스타일은 여느 예술가들과 다르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불규칙한 생활을 하며, 야행성 활동에 익숙하다. 하지만 허영만은 마치 ‘공무원처럼’ 일한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일찍 화실로 출근해서는 퇴근시간(!)인 오후 5시까지 꼼짝도 안하고 일을 한다. 그는 이 수도승 같은 작업 스타일을 수십년 동안 고수해오면서 11만1,000 페이지에 달하는 만화를 그려냈다. ‘각시탈’에서 시작해 ‘무당거미’, ‘오! 한강’, ‘고독한 기타맨’, ‘비트’, ‘아스팔트 사나이’ 등으로 이어지다 최근 ‘타짜’와 ‘식객’에 이르는 그의 방대한 작품세계는 그토록 지독한 노력의 산물이다.
내가 허영만을 처음 만난 것은 1996년 ‘비트’의 시나리오를 쓸 때였다. 나 역시 오래 전부터 허영만 만화의 광적인 팬이었던지라 그와의 첫만남은 가슴 설레이는 경험이었다.
그는 첫인상부터 시원시원한 사내였다. 그는 허름하지만 멋지게 어울리는 옷을 입은 베스트 드레서였고, 두주불사의 호쾌한 술꾼이었으며, 자잘한 계산 따위는 훌쩍 뛰어넘는 통 큰 남자였다.
그는 심지어 내가 쓴 시나리오를 들이밀자 들춰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만화는 내 작품이지만 시나리오는 심형 작품이야. 심형 작품을 왜 나한테 검사 받으려 그래?” 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처럼 멋진 원작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허영만이 화실 혹은 술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다.
그가 찾아낸 새로운 공간은 바로 산이었다. 그는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일을 하고 난 주말이면 언제나 산을 찾았다.
산악인 박영석과 형제 같은 우애를 나누기 시작한 이후에는 히말라야의 이곳 저곳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한국등산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등반교육과정을 이수하더니 내친 김에 백두대간 종주까지 끝마쳤다.
그는 한반도의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정상의 만화가로서 살아온 자신의 반평생을 되돌아 보았을지 모른다. 허영만은 이렇게 말했다. “산은 뒤돌아 보는 맛이야. 종주 등반을 하다가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길들이 아득한 꿈처럼 펼쳐져 있지. 그렇게 가슴 뭉클할 수가 없어.”
허영만이 박영석과 함께 오세아니아 최고봉 칼스텐츠(4,884m) 정상에 올랐을 때 나는 ‘감’을 잡았다. 칼스텐츠는 일반인이 오르기 힘든 산이다. 정상 피라미드 부근의 암벽 구간이 상당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을 뿐더러 정치 사회적인 이유로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무엇보다도 이 산은 저 유명한 ‘세븐 서밋’(Seven Summits)에 속한다. 하지만 내가 추궁(?)을 해도 그는 지레 손사래를 쳐댔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 그런 걸 하겠어? 어림도 없지!” 하지만 그 이후에도 허영만의 발걸음에는 뚜렷한 방향성이 있었다. 유럽 최고봉 엘브루즈(5,642m)와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에 연달아 오른 것이다.
얼마 전 그를 인사동의 선술집 ‘식객’에서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멋쩍게 웃으며 등산복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내가 조금 미쳤나 봐. 나 요즘 이러고 다녀.” 맙소사, 그는 두툼한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그는 지난 몇 달간 만화를 그릴 때나 취재를 다닐 때나 산에 오를 때 줄곧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었다고 한다. 코 앞으로 들이닥친 에베레스트 원정에 온통 신경이 곤두 서 있는 것이다. 허영만은 이제 더 이상 수줍은 손사래를 치지 않는다.
그는 북미의 맥킨리, 남미의 아콩가과, 그리고 남극의 빈슨매시프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심형은 작년에 에베레스트 북쪽으로 올라가 봤잖아? 솔직하게 말해줘. 내가 그곳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애?” 나는 담배 한 대를 다 태운 다음 나직하게 답했다.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허영만이 과연 세븐 서밋을 완등할 수 있을까? 그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신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그가 세븐 서밋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여기 내일 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서 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가슴 속에 또 다른 정상 7개를 품고 살아간다. 2006년 4월4일 그 사내가 4번째의 정상을 향해 장도에 올랐다. 박영석이 이끄는 ‘2006 트랜스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당당한 대원으로서 자신의 꿈을 찾아 나선 것이다. 나도 그처럼 멋지게 나이를 먹어가고 싶다.
◆ 세븐 서밋
맥킨리, 아콩가과, 킬리만자로… 박영석·오은선 등 완등
지구상에 존재하는 7대륙 최고봉을 말한다. 세븐 서밋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전에는 흔히 ‘5대륙 최고봉’을 논하곤 했다.
최초의 5대륙 최고봉 등정자는 일본의 우에무라 나오미(1941~1984)였다.
그는 아시아의 에베레스트(8,850m), 북미의 맥킨리(6,194m), 남미의 아콩가과(6,960m),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유럽(알프스)의 몽블랑(4,808m)을 모두 오른 최초의 산악인이다. 하지만 이후 몽블랑은 유럽 최고봉의 자리를 엘브루즈에게 내주게 된다.
세븐 서밋은 5대륙 최고봉에 덧붙여 남극의 빈슨매시프(4,897m)와 오세아니아의 칼스텐츠(4,884m) 혹은 코지어스코(2,228m)를 포함한다. 칼스텐츠와 코지어스코가 동시에 거론되는 것은 이 개념이 형성되던 초창기의 혼란 탓이다.
공식적으로 최초의 세븐 서밋 완등자는 미국의 사업가 딕 배스(1985년ㆍ당시 56세)인데, 이 때는 코지어스코를 오세아니아의 최고봉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후 칼스텐츠를 손꼽기 시작하면서 혼란은 지속되고 있다. 현재는 이 둘 중의 하나를 오르고 나머지 6개의 산을 모두 오르면 세븐 서밋 완등자로 인정하는 추세다.
세븐 서밋 개념이 전 세계 산악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이상처럼 여겨진 데는 딕 배스의 초등기록 ‘세븐 서밋’이 미친 영향이 크다. 이 책은 ‘불가능한 꿈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전 세계에서 이 꿈을 이룬 사람들은 아직 200명을 넘지 않는다.
가장 등반하기 힘든 산으로는 역시 에베레스트와 맥킨리를 꼽고, 접근 과정 자체가 쉽지 않은 산으로는 빈슨매시프와 칼스텐츠를 꼽는다. 세븐 서밋을 완등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체력 그리고 의지 외에도 상당한 재력이 필요하다. 국내 산악인들 중에서는 박영석과 오은선 등이 완등자의 대열에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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