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가 처음 발명돼 보편화하던 때, 이 새로운 기계를 가장 활발하게 사용했던 분야는 의학과 범죄학이었다. 의학에서는 병을 가진 사람들을, 범죄학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촬영했다. 지금으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병자와 범죄자들을 구별짓는 어떤 특징적 생김새가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카메라가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별해내는 기계가 됐던 것이다. 인류학 분야에서도 사진은 키가 (서양인 학자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작은 오지 원주민 모습의 ‘증거’가 됐다. 병이나 죄와는 무관한 보통의 서양인들은 굳이 카메라를 통해 타자화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카메라는 캠코더나 디지털카메라로 바뀌고 사진은 동영상으로 대체됐지만, 정상과 비정상을,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기능은 여전히 은밀하게 작동 중이다. 그리고 방송사는 그 역할을 제도적으로 수행한다. 텔레비전은 평범한 (우리의) 삶과 특별한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대조한다.
여기서 ‘그들’은 멋진 미국인 배우일 수도 있고 아프리카 원주민일 수도 있으며,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기일 수도 있고 순박한 촌로나 흉악한 범죄자일 수도 있다. 시청자들은 이들의 모습을 보며 ‘다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는 한편 나머지 대다수인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런데 이 다름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방송의 무게중심은 ‘이해’에 놓여야 한다. ‘그들’의 신기함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 목표여서는 곤란하다. 작년 한 해 동안 방영된 TV 드라마의 30% 가량이 한 번이라도 해외 촬영을 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가보지 못한 유럽 관광지나 미국의 대학을 배경 삼아 한국 배우들이 연기를 했다. 눈요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혹은 가보고 싶은 동기는 유발시킬지언정, 시청자들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에 대해 뭐 하나라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최근에는 오락 프로그램들도 해외 촬영물들을 쏟아낸다.
말만 외국이지 수영장 한 곳에서 여전히 똑같은 춤 자랑, 입담 자랑하는 내용은 그나마 호기심조차 유발시키지 않는다. 외국의 특정 리조트나 식당, 아니면 화면 속 특정 연예인의 홍보에 그치는 교양물의 해외촬영에도 소위 ‘교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의 신기함도 문제지만 ‘우리’의 결속이 지고지선의 목적이어서도 곤란하다. 얼마 전 끝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는 야구를 좋아하는 여러 나라가 모여 경쟁을 벌인 일종의 축제였다. 하지만 중계건 특집 프로건 감상적 애국주의는 시종 축제 분위기를 압도했다. 한국 팀이 탈락했다고 해서 결승전 중계마저 포기했다.
‘우리’가 아닌 모든 다른 나라들은 그저 적이었을 뿐이다. 미국이나 일본 선수들을 동물에 비유하며 비아냥대는 철없는 네티즌들도 혹시 방송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운동경기만이 아니다.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이 아닌 편협하고 과장스런 우월감을 부추기는 해외 촬영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전 지구가 하나의 촌락으로 묶인다는 세계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해외자본 유치만이 세계화의 모습은 아니다. 해외여행 천만 명 시대가 세계화의 본질은 아니다.
유럽의 귀족이건 아프리카 오지의 소년이건 모두 같은 시대를 사는 똑같은 사람임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구경거리도 아니고 적도 아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세계화다.
지난 달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한국계 혼혈인들을 다룬 바 있다. 최근 며칠 한국계 미국 프로풋볼 선수인 하인스 워드의 귀국이 떠들썩하게 보도되고 있지만, ‘같음과 다름’, ‘우리와 그들’에 대해 ‘그것이…’가 가졌던 분별 있는 시선을 다시 찾기는 쉽지 않다.
모든 프로그램에서 해외촬영을 금지해야 한다거나 외국 풍물 소개가 없어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락 프로그램에서 오락성을 빼야 한다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그것이…’에서처럼 제작진이 가진 시각은 프로그램 내용 어딘가에 깊게 배게 마련이며, 따라서 PD나 출연자들부터 타자를 보는 시선을 건강하게 바꾸자는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다.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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