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말로 듣는 것보다는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시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는 확실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눈도 왜곡된 정보를 준다.
아래 두 그림을 예로 들어 보자. 그림 A는 동일한 길이를 가진 선분에 화살표의 방향만 다르게 표시한 것이다. 길이는 똑같지만 화살표의 방향으로 인해 아래 선분이 더 길어 보인다.
그림 B는 동일한 농도를 가진 회색 네모를 하얀색 배경과 검정색 배경에 놓아둔 것이다. 정확히 동일한 농도의 회색 네모이지만 검정색으로 둘러싸이면 상대적으로 더 밝아 보인다. 이처럼 주위 배경이나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착시’ 현상은 시각이 전달하는 정보가 100% 정확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착시 현상과 비슷하게 눈이 혼란을 느끼는 현상으로 ‘색채 입체시’라는 것이 있다. 한 색깔로 된 물체를 바라보면 눈의 망막 위에 정확히 맺히지만 파장이 매우 틀린 두 색상, 가령 파랑과 빨강색을 띠는 두 물체를 동시에 쳐다보면 눈은 이들을 동시에 망막 상에 맺히게 하는 데 큰 혼란을 느낀다.
색깔이 틀린 두 빛이 눈을 통과하면서 굴절되는 정도가 달라지는 ‘색수차’라는 특성 때문이다. 프리즘이 햇빛을 무지개 색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햇빛을 구성하는 각 색깔들이 프리즘을 거치면서 굴절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컴퓨터 모니터에 파랑 네모를 하나 만들고 그 위에 빨강색 도형을 하나 그려 놓으면 파랑보다 빨강이 더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듯한 입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빨강 도형 주위에 굵은 검정 테두리를 둘러 주면 입체감이 더 명확해 진다. 이것이 바로 ‘색채 입체시’ 현상이다.
두 색상이 망막에 동시에 맺히지 못하고 파랑의 상이 빨강색 상의 뒤쪽에 맺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그림을 오래 보게 되면 눈과 뇌는 시야에 들어오는 전체 이미지의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수행하게 되어 시각체계에 상당한 스트레스가 주어지게 된다.
눈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착시의 예로 잔상(殘像)현상을 들 수 있다. 가령 빨강색을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하얀 벽을 쳐다보면 엷은 청록색이 시야에 남아 있는 잔상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사람 눈의 망막에 존재하는 세 종류의 시세포, 즉 각각 적, 녹, 청색 빛의 자극에 가장 민감히 반응하는 적추체, 녹추체, 청추체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빨강을 계속 쳐다보면 세 종류의 시세포 중 빨강에 반응하는 적추체가 가장 많이 일을 하는 셈이다. 따라서 적추체는 쉽게 피로해진 상태에서 빨강에 대해 둔해지게 되지만 녹추체와 청추체는 계속 민감하게 반응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상태에서 흰색 벽을 보게 되면 세 시세포들의 상태 사이의 균형이 깨져 있기 때문에 청록색 잔상이 인지되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흰색 가운을 입고 진료를 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수술할 때만큼은 청록색 수술복으로 바꿔 입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장시간의 수술 동안 계속 빨강색 피를 보아야 하는 상태에서 흰색 가운을 입고 수술에 임한다면 가운을 볼 때마다 빨강의 보색인 청록색 잔상이 보이게 되고 수술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게 된다.
반면 청록색 수술복을 입게 되면 청록색 잔상이 생길 여지가 아예 없어져 버리므로 장기간의 수술에도 집중력을 방해할 잔상효과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고재현 교수
한림대 전자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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