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애틀 추장(1786?~1866).
미국 워싱턴주 지역에 살던 인디언 부족의 지도자. 워싱턴주의 시애틀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젊어서 용감한 전사로 이름을 날린 그는 키가 매우 컸으며 연설할 때에는 목소리가 반 마일 넘게 울렸다고 한다.
그는 부족의 땅을 미국 정부에 넘기는 조약을 맺었는데, 유명한 그의 연설은 1854년에 부족을 모아 놓고 미국의 파견 관리 앞에서 행한 것이다. 땅을 잃고 보호 구역으로 쫓겨난 인디언들은 그를 겁쟁이이자 배신자로 여긴 반면에 일부 다른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어려운 결정을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의 장녀 프린세스 앤절린(Princess Angeline)은 조약 체결에 따른 퇴거 명령을 무시하고 시애틀시에 눌러 앉아 수공예 바구니를 팔면서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다.
▲ 시애틀 추장의 연설 발췌문
미국 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 왔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들이 총대를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대들에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 형제이고 우리 갈증을 풀어 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 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그대들은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 놓을 것이다.
(중략)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생태주의적 비전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자주 인용되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은 아름답고 시적이다. 우주 및 세계와 그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인디언 특유의 세계관과 자연관을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연설에는 땅을 빼앗기는 사람의 비애와 서글픔이 밑바닥에 깔려 있고 그 정서는 투박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를 통해 울리고 있다.
미국 서부 영화에서 흉포한 야만인으로 왜곡되어 온 것과는 전혀 달리, 인디언들은 모두가 시인이었던 셈이다. ‘땅이란 것은 애당초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시적 정의(poetic justice)’에 속하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것은 인디언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세계 및 현실 인식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밀히 말해서, 이 작품의 저자는 시애틀 추장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떠돌아다니는 시애틀 추장 연설의 판본에는 대략 4종이 있다. 최초의 판본은 시애틀 추장의 친구였던 헨리 스미스 박사가 1887년 신문에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 스미스 박사는 치누크족의 말을 몰랐다(워싱턴 주의 별칭이 치누크 주인데, 이 지역에 살았던 인디언 부족의 이름을 땄다).
그러니까 시애틀 추장의 연설 현장에 스미스 박사가 있었던 것은 오늘날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추장이 죽은 뒤 30년 이상 지난 뒤에야 세상에 나온 최초 판본의 내용과 수사적 표현은 시애틀 추장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이다.
두 번째 판본은 1960년대에 더 모던한 영어로 편집됐고, 오늘날 가장 유명한 세 번째 판본은 1970년대 초에 시나리오 작가인 테드 페리가 ‘고향’이라는 TV용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다시 번안했다. 이 세 번째 판본은 1980년대에 신화학자 죠셉 캠벨이 인용함으로써, 그리고 이후에 아동용 도서를 포함한 많은 책과 TV 프로그램 및 교회에서의 설교 등을 통해서 유포됨으로써 유명해졌다. 마지막 판본은 세 번째를 더 간략하게 압축한 것이다.
문학 작품의 기원을 저자에게서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상의 역사적 배경 지식만으로도 이 연설이 본디 시애틀 추장의 것은 아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오히려 이 작품은 많은 구전 설화와 마찬가지로 입에서 입으로, 혹은 귀에서 귀로 전달되는 동안 살아 남아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면, 결국 작품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의 것이라는 평이한 진실에 이를 수도 있다. 어쨌든 간에, 그렇지만 여전히, 시애틀 추장으로 알려진 시적 화자의 수사적 질문은 여전히 우리 가슴에 시적 울림을 던진다. “땅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사고 판다는 말인가?”
판교의 아파트 청약이 시작되었다. 판교 아파트는 32평형의 경우 분당에서처럼 가격이 오른다면 최저 1억3,000만원에서 최고 3억원까지의 시세 차익을 노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판교 로또’라고 부르는 게 당연하다. 한 해에 1,000만원을 저축하는 게 힘든 보통 사람들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다만 로또와 다른 점은 비교적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첨되며, 또 당첨되더라도 외국으로 나가서 한 달 정도 도피하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못살게 굴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여론 조사는 서울에서 중산층 소리를 들으려면 11억원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이 기준으로 중산층이 되려면 분당의 32평형 아파트 두 채 이상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중산층이 아닌 사람들, 이 뜨겁고도 허망한 ‘로또 판’에서 재수 없게도 떨어질 사람들, 또 청약 통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자격이 되질 않아서 청약을 하지도 못한 사람들, 그리고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아예 청약 통장을 갖고 있지도 못한 사람들은 대체 무슨 꿈을 갖고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판교에서만 로또 판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1조4,000억을 들여 헐값으로 외환은행은 인수한 미국계 펀드 론스타는 2년 만에 최소한 3조2,000억원 이상의 이익을 챙기게 되었다. 현대ㆍ기아차 그룹은 구조 조정 차원에서 매각한 계열사 회사채를 반값에 사들인 후 다시 인수 합병하면서 500억원 이상의 채무를 털어냈다고 한다. 32평형 기준으로 론스타는 최소 10만 채에서 최대 20만 채, 현대는 170여 채에 해당하는 시세 차익을 거두게 되었다.
이 먹이 사슬 구조는 단순하다. 결국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이다. 다만, 놓는 돈의 액수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힘이 세면 셀수록,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브로커와 로비스트를 동원해서는, 불법적 내지는 편법적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따먹을 수 있다는 거다. 먹이 사슬 최상층부의 당첨 확률은 100%다. 이러한 먹이 사슬의 중간 부분 어딘가에 ‘판교 로또’가 자리잡고 있는 건데, 지금은 판교에서의 분양 경쟁이 아주 뜨겁고도 치열하게 달아오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일수록, ‘땅이란 것은 애당초 소유할 수 없다’는 시애틀 추장의 말이 우리 가슴을 때리고 우리 마음에서 울린다. 이 효과는 한편으로는 시적, 생태학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역사적으로 작동한다.
게다가, 작품의 기원이 작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는 땅과 집의 사회적 소유 형태의 문제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고 파는 데서 생기는 부당하고도 불평등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소유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데서 출발한다.
내 생각에, 한국 사회는 소유 문제에 대한 정치적ㆍ사회적 성찰 및 상상력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래디칼(radical)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그것은 ‘시적 정의’에 속한 것을 역사적ㆍ현실적으로 실현시키는 길이다. 특히 먹이 사슬의 아랫 부분에 붙박인 채 살아가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문화비평가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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