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놀이’라는 말의 뜻은 어른이 조금 되어야 알 수 있다. 어릴 적에는 ‘동네 화단에 개나리가 가득하고 근처 화원에 장미가 만발한데 굳이 꽃을 ‘구경’가는 이유가 무얼까?’ 의문을 갖게 된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꽃’같은 날들인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향기에 취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지금 활짝 피고 있으니까, 내 향기만으로도 충분히 동하고 있으니까 다른 꽃은 피는지 지는지 알 겨를이 없는 거다. 그러다 문득 ‘아, 올해도 벌써 꽃이 피는 구나’감탄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겨우내 마른 기둥만 만져지던 산에, 죽은 줄 알고 버리려 했던 화분에 어느 아침 피어 있는 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매년 피고 지던 꽃인데, 늘 거기 있던 꽃인데 나는 이제야 새삼 ‘발견’하게 된 것이다.
♥ 섬진강, 교토, 지베르니
매화마을로 알려진 섬진마을의 봄은 화려하다. 10만 그루에 달한다는 매화나무에 꽃이 피기 때문이다. 아무 언덕에나 단숨에 올라 마을을 내려 보면 온 마을이 꽃 세례를 맞은 듯이 반짝거리는데, 흰 꽃잎 사이로 집마다 지붕만 도드라져 재미있는 그림이 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지천으로 핀 꽃은 아무리 눈을 감아 보아도, 눈감은 데까지 따라오며 핀다고 했다. 실제로 햇빛을 받은 꽃마을을 한참 보다가 눈을 감으면 검은 바탕에 흰 꽃들의 잔상이 오래 아른댄다.
꽃구경 좋아 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닐 것이다. 일본에서도 ‘하나미’라고 해서, 벚꽃구경을 다닌단다. 특히 간사이 지방의 교토시는 봄마다 벚꽃이 만발하고, 꽃이 질 무렵이면 흩날리는 꽃송이가 마치 비 내리듯 한데, 기모노를 빼입은 여성들이 꽃비에 섞여 있어서 더욱 이국적이다.
꽃을 보러 길 떠나는 일이 동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를 예로 보자. 계절 없이 따뜻한 프랑스의 남쪽 지방과는 달리 수도 파리는 네 개의 계절을 분명하게 거친다.
폭염과 소나기가 반복되는 여름과 쓸쓸한 가을, 혹한으로 거리에 사람이 덜 다니게 되는 겨울은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돌아오게 되는 봄에는 파리지앵들이 유독 들뜨게 되는데, ‘4월의 파리(april in Paris)'라는 노래가 오래도록 애창 되는 것도 파리의 봄이 유독 반갑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에서 70여 km를 달리면 노르망디 안에 자리 잡은 지베르니(Giverny)라는 동네에 이른다. 인상파 화가 모네의 정원이 있는 곳이다. 19세기의 어느 날, 낡은 기차를 타고 동네를 지나던 그가 만발한 꽃과 단아한 못(淵)에 반하여 눌러 앉았다는 그 곳. 봄이면 갖은 꽃나무의 봉오리가 모네 마을 전체에 툭툭 터지며 파리지앵들을 유혹한다.
쟈스민이나 제라늄, 장미와 같이 향기가 요사스러운 꽃들은 모두 심어 놓아서 좁다란 정원 길로 들어서면 숨이 멎을 듯 취하게 되는데, 모네와 같은 거장이 아니어도 그림이 절로 그려질 것만 같다.
♥ 꽃무늬 롤 도시락
섬진강을 돌고 나면 재첩이 있고, 교토에는 유명한 전통 요리와 지베르니에서 먹을 수 있는 까망베르 치즈와 사과주(酒)가 있지만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에 비할까?
‘도시락’하면 떠오르는 김초밥을 살짝 변형하면, 썰어 낸 단면이 꽃처럼 예쁜 초밥을 만들 수 있다. 준비할 재료는 맛있는 김(아주 중요하다. 조직이 탄탄하고 향그러워야 한다), 흰 쌀밥(밥알이 탱탱하게 살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몇 가지 부속 재료들. 김하고 밥이 맛있으면 부속 재료의 선택은 더 자유로워지는데, 밥은 뜨거울 때 식초와 설탕, 소금 약간으로 간을 하여 비빈 다음 식혀야 한다.
부재료로는 색이 예쁜 야채를 준비하여 데치거나 볶은 다음 살짝 초절임 해 두면 좋고, 자잘한 버섯을 우엉처럼 단 간장에 졸여도 된다.
여기에 볶은 고기를 올려도 괜찮지만 살이 붉은 참치나 연어와 같은 생선을 써도 별미다. 횟감으로 준비 된 참치나 연어를 식초와 맛술, 소금과 후추에 잠깐 담갔다 건져 물기를 제거하고 여기에 고추냉이를 조금 섞은 마요네즈를 곁들이면 된다. 예를 들면 김 위에 밥을 펴 얹고, 여기에 초절임한 아스파라거스와 당근, 일본 깻잎인 시소 잎을 몇 장 깐 다음에 비린내를 없앤 연어와 톡 쏘는 듯 달콤한 고추냉이 마요네즈를 얹고 김발로 말아준다.
손끝에 힘을 단단히 줘가며 야무지게 만 다음, 잘 드는 칼로 어슷하게 썰어내면 완성! 도시락에 착 펴서 담아내면 그림이 그려진 부채인 듯 화려한 모양이 된다. 섬진강이라면 매실주를, 교토에서는 청주를 그리고 지베르니에서는 상큼한 사과 와인을 곁들이면 되겠다.
프랑스 영화감독 프랑소와 오종의 영화 ‘타임 투 리브(원제는 ‘남겨진 시간’)’는 성공 가도에 오르기 시작한 젊은 사진가에게 종양이 있다는 선고를 내리며 시작한다. 주인공은 그냥 어지럼증이 미심쩍어 병원에 간 것이었는데, 제 인생에 남겨진 시간이 몇 달 남짓이라는 판결을 듣게 된 것이다. 병원을 나온 그가 공원에 앉아 있노라니 나뭇가?사이로 보이는 햇살, 풀밭에 앉아있는 연인들이 다 새삼스럽다.
차를 달려 바닷가에 누웠더니 파도소리, 모래의 감촉 그리고 땀을 흘리는 자신의 몸이 다 경이롭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를 좇는 동안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때마다 알기란 쉽지 않지만, 한 박자 쉬면서 자연의 조화에 넋을 잃어 보는 것은 오늘이 아니면 고쳐 못할 일일지도 모른다.
EBS 요리쿡 사이쿡 진행자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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