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의 계절이 돌아왔다. 바위가 찬 기운과 살얼음을 털어내고 봄 햇살의 온기를 머금기 시작할 즈음인 이 맘 때가 되면 암벽등반을 즐기는 사람들의 몸놀림이 바빠진다.
지난 주말에 오른 북한산에서도 이미 한 해의 첫 바위를 시작한 사람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바위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반 등산로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마치 수직의 벽에 붙어 있는 곡예사들처럼 보인다. 일반 등산객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기만 할 뿐 감히 그들의 뒤를 쫓아 오르려 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되 수직의 벽이 아니라 수평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면 생각은 조금 달라진다. 이른바 암릉과 마주했을 때이다. 일반 등산로보다는 물론 험하다.
하지만 암벽등반의 대상인 수직 바위벽보다는 만만해 보인다. 자, 이 길에 붙어 바위를 오르내리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저 아래로 보이는 일반 등산로 쪽으로 내려가 우회할 것인가. 쉽지 않은 결단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라치면 어디선가 홀연히 ‘도사’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 별로 안 어려워요, 그냥 나만 따라오면 돼요.”
이 계절에 흔히 보게 되는 산중 풍속도다. 이 ‘도사’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날다람쥐처럼 바위를 잘 탄다. 그들은 오르는 코스에서 손으로 붙잡을 곳과 발로 디딜 곳을 거의 달달 외우고 있다. 그들은 헬멧은커녕 자일이나 안전벨트조차도 갖추지 않은 채 천길 낭떠러지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다닌다.
이들은 ‘용감한 전문가’들인가, 아니면 ‘무식한 사고뭉치’들인가. 불행하게도 후자에 속한다. 한국 등반 교육사의 산 증인으로 꼽히는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이용대(69)는 이들 이른바 ‘리지꾼’들에 대해 혹독한 비판과 안타까운 우려를 마구 토해낸다.
“국내 등반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암릉 등반? 결코 얕잡아 봐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암벽 등반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 바로 암릉 등반입니다. 기술과 장비를 갖추지 않은 채 바위에 달라붙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어요.”
칠순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아직도 모든 바윗길을 선등하는 현역 클라이머다. 그가 바위에 오르는 모습은 마치 ‘물이 흐르듯’ 유연하고 자연스럽다. 다만 자연의 물은 아래로 흐르되 그의 오름짓은 위로 흐른다는 것이 다를 뿐. 그가 동양산악회 소속으로서 1970년대에 개척해 놓은 인수봉의 동양길과 궁형길은 그 이후 세대들의 클래식이 되었다. 그가 1985년에 설립한 코오롱등산학교는 국내 등반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그 이전까지는 단위 산악회에서 기술 위주로 전수되던 등반문화가 이제는 일종의 종합대학식 전인 교육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교육과목에 ‘등반윤리’나 ‘산악문학’ 혹은 ‘산노래’가 포함되어 있는 등산학교는 이곳 뿐이다. 이 학교에서 그가 다양한 사고 현장들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강의하는 ‘조난대책’을 들을 때면 수강생들 모두 숙연해진다.
“등반의 최우선은 ‘안전’입니다. 등산학교란 현란한 등반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에요. 바로 ‘안전등반’을 가르치는 곳이죠. 산의 아름다움도, 등반의 즐거움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한 순간에 부서져 버리는 허망한 꿈이 되어버립니다.”
그가 안전등반과 조난대책을 남달리 강조하는 이유는 쓰라린 개인사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는 손아래 동생 둘을 모두 산에서 잃었다. 바로 밑의 동생은 만경대 암릉 등반 도중, 그리고 막내 동생은 선인봉 암벽 등반 도중 운명을 달리 했다. 이용대 교장 자신 역시 인수봉에서 치명적인 추락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 타고난 암벽 등반가는 그런 사고 이후에도 바위를 떠날 수가 없었다. 대신 자신이 터득한 모든 지식과 기술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데 여생을 송두리째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산사람은 본래 별다른 핑계거리를 찾지 않는다. 당신에게 산은 무엇이냐고 묻자 이용대 교장은 “바위에 오르는 것이 곧 나의 삶”이라고 짧게 답한다.
그런 이용대 교장이 자신이 이끄는 코오롱등산학교의 강사들과 함께 3년 동안 전국의 암릉길을 돌아본 다음 반가운 역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바로 ‘즐거운 암릉길’이다. 그가 전국을 다섯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한국을 대표할만한 암릉길의 선정과 등반과 취재를 지휘하는 모습은 마치 필생의 전쟁에 임한 야전사령관처럼 보였다.
직접 등반을 하고 사진을 찍고 개념도를 그려야 했던 강사들 역시 그 힘겨운 과업을 마치 소풍이라도 다녀오듯 즐거운 마음으로 해치웠다. 지난 3월 27일 서울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즐거운 암릉길’ 출간기념 회식연이 열렸다. 한국 산악계의 내로라하는 암벽등반가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즐겁게 잔을 맞부딪쳤다. 그것은 노등반가에게 보내는 존경과 감사의 표시이기도 했다.
◆ 강사진과 '즐거운 암릉길' 출간
전국 바위능선 3년간 순례 47개 코스 소개
영어의 ‘리지’(ridge)는 본래 암릉(岩凌)뿐 아니라 일반적인 산릉이나 산등성이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국내 등산용어로서의 ‘리지’란 험준한 바위능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국한돼 사용되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리지 등반’이란 곧 ‘암릉 등반’을 의미한다. 외국에서는 암릉 등반을 암벽 등반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곧 숙련된 기술과 안전장비의 사용을 당연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의 암릉 등반은 만용을 앞세워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고 실제로 다양한 사고들을 유발한다.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진들이 3년에 걸쳐 전국의 암릉들을 순례하며 만들어낸 ‘즐거운 암릉길’은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암릉 등반 안내서이다. 대표강사 윤대표를 비롯하여 윤재학, 김형주, 한동철, 윤대훈 등 16명의 강사들이 전국 13개 산 47개 코스를 일일이 답사하여 펴낸 이 역저에는 암릉의 이름과 형태, 난이도와 길이, 소요장비와 등반시간, 비박지와 식수지점, 진입로 등이 생생한 사진과 도표로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에 덧붙여 암릉 등반의 위험 요소와 조난대책 그리고 실전에 필요한 조언 등이 실려 있어 ‘안전등반’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우는 이용대 교장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조언들 중에 ‘따라다니면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항목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위험한 구간을 로프 없이 다람쥐처럼 뛰어 다니는 사람, 다른 이의 등반모습을 보고 비난하거나 참견하는 사람, 군대식 점프기술로 뛰듯이 하강하는 사람, 자일을 땅바닥에 놓고 함부로 밟는 사람, 사용하지도 않는 장비를 가지고 다니며 자랑하는 사람, 자일이나 카라비너를 배낭 밖으로 보이게 하는 사람, 유명 산악인을 잘 아는 후배인 것처럼 자랑하는 사람, 헤드랜턴을 가지지 않고 다니는 사람, 배낭에 종을 달고 다니는 사람…..너무도 익숙한 풍경들이다. 이런 이들을 믿고 암릉 등반에 따라나서는 것은 지양해야 된다.
산악문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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