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일간지 유에스에이투데이는 한국을 동아시아의 ‘어린 민주주의’(young democracy) 국가로 분류했다. 여기서 어린 민주주의란 미성숙한 민주주의를 말한다. 가두시위와 탄핵 소동, 정책 경쟁보다는 정치인의 도덕성 논란 등으로 지새는 미성숙 단계의 민주주의다.
정당 정치의 약화 속에 피플파워 피로증이 두드러지고 있는 필리핀, 재산가 탁신 총리의 퇴진 요구 시위로 정정이 불안해지고 있는 태국, 천수이볜 총통의 포퓰리즘 정치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만 등이 이 신문이 꼽은 동아시아의 어린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정책보다 정적 흠집내기에 골몰
요즘 야구 WBC 4강,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종목 싹쓸이에, IT다 한류다 해서 한껏 우쭐해진 우리 국민들이다. 그런데 미성숙한 민주주의로 이런 나라들과 같은 묶음 취급을 받다니 기분이 썩 좋을 리 없다.
미국 언론의 고질적인 아시아 깔보기가 아니냐는 반감도 생긴다. 그러나 일리가 있는 지적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신문이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 사례로 든 것은 3ㆍ1절 골프 파문으로 물러난 이해찬 전 총리 문제였다.
이 사건이야말로 취약하고 미숙한 정당들이 정책을 갖고 경쟁하기보다는 정적의 윤리문제를 들추는 일에 몰두하는 동아시아 어린 민주주의 전형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파동도 한국의 민주주의 미성숙을 증명하는 예로 거론됐다.
이 전 총리의 낙마는 자신의 부적절한 처신과 당사자들의 거짓 해명이 사태를 악화시킨 결과였지만 외국인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비친 모양이다. 사실 로비의혹 등이 개연성만으로 지나치게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
검찰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결국 실체가 없었던 국민의 정부시절 옷 로비 사건의 재판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로비의 실체보다는 지엽적인 문제에 엄청난 정치적 에너지를 소모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황제 테니스’ 논란도 비슷한 소모적 정치공방의 수순을 밟아가고 있다. 이 시장의 일련의 처신들이 부적절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선출직 공직자로서 공인의식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지 새삼 놀랍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국정조사까지 들먹이며 대대적으로 공세를 펼 만한 사안인지는 의심스럽다.
당장은 5ㆍ31 지방선거를 의식한 정치공세이고 길게는 차기대선의 유력 주자인 이 시장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려는 노림수일 것이다. 이 전 총리의 골프 스캔들 공세로 크게 당한 열린우리당이 이 시장의 테니스 스캔들을 키워 고스란히 앙갚음을 하는 셈이기도 하다.
●명품정치 보게 될 날 언제일까
손학규 경기지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 시장의 황제 테니스 논란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이라고 개탄했다. 그 같은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운 행태는 도처에서 횡행하고 있다.
청와대가 후임 총리 인선과정에서 카드 놀이처럼 김병준 카드와 한명숙 카드를 요리조리 내보이며 게임을 벌인 것이나 한나라당이 정치적 계산에 따라 총리후보에 대한 입장이 오락가락하며 말려들었던 것도 눈뜨고 보아주기 힘든 가벼움이었다.
대선의 전초전인 지방선거가 코 앞에 다가왔으니 그 같은 정치 행태들이 더욱 판을 칠 게 뻔하다. 벌써부터 각 당 주변에서 벌어지는 공천 잡음, 탈당 소동 등이 심상치 않다.
정치판이 도덕적 흠결 공방에 몰입하면 정작 중요한 현안은 뒷전으로 묻힌다. 비자금과 자녀 병역 논란, 색깔 공방이 중심이었던 근래 몇 번의 주요 선거가 그랬다.
이번 5ㆍ31선거는 물론이고 차기 대선도 나아질 가망은 희박해 보인다. 엊그제 어느 단체장 후보자는 정치 신상품론을 들고 나왔지만 우리 정치도 명품정치로 업그레이드되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어린 민주주의 취급을 받지 않게 말이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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