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첫 토요일에 나는 덕수궁 뒤편 서울시립미술관에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인 앙리 마티스를 비롯해서 인상파로부터 야수파까지 이어지는 현대회화 전시를 보러 간 길이었다.
●마티스전의 남자들 시큰둥해 보여
물론 나는 파리와 니스 그리고 뉴욕에서 이미 여러번에 걸쳐 마티스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유학 생활에 힘이 들면, 학생들을 위한 싼 비행기표로 훌쩍 날아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니스 언덕의 마티스미술관 근처에서 한 이틀 어슬렁거리며 얼마나 커다란 위안을 받곤 했던가. 그의 그림은 모차르트의 음악이 그러하듯이 나에게는 평화와 행복 그 자체였다.
그 색채의 향연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염성이 아주 강한 것인 모양이다. 전시장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림에 코를 박고서 아주 더디게 움직이는 관람객들의 얼굴에는 환희의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리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졌다고 해도 생명의 에너지 가득한 원작의 감동을 한꺼번에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기획자의 의도가 잘 전해지는 전시였다. 코끝에 전해지는 봄의 기운과 함께 색채의 잔치를 마음껏 누리는 풍경은 그래서 아름다웠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여성 관람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마나 간신히 눈에 띄는 남자들도 거의 다 아이들이나 연인의 손에 이끌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그림에 몰두하는 정도도 덜해 보였다. 마침 조소과 여학생과 함께 온 내 남학생 제자의 표정도 그 언저리 어디쯤이었다. 관심이 가는 일이었다.
지난 20세기에 우리 한국인은 밥을 해결했다. 막 들어선 21세기는 그래서 문화의 시대다. 산업화에 성공한 힘을 문화라는 분출구를 통해 마음껏 쏟아내야 할 때인 것이다.
우리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한 문화적 감수성이 중요해진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남성들은 농경과 산업사회로 이어지던 남성 우월적 삶의 양식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닐까.
●섬세한 감수성이 세상 움직이는데…
학교에서 여학생들이 주도권을 쥔 지는 이미 꽤 되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꼼꼼함으로 그들이 사회를 움직여갈 날도 멀지 않았다. 정보통신과 생명공학 분야에서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이는 여성들도 적지 않다. 삼성은 디자인에 눈을 돌리며 브랜드 파워에서 소니를 따라잡았다.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최고를 기록하며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 산업의 힘은 이제 여성들의 부드럽고 섬세한 감성과 만나 꽃을 피우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전시장을 메우는 저 여성 관람객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새로운 성장 동력, ‘블루 오션’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21세기 문화 감성의 시대에 구닥다리 남자로 남지 않기 위해 이 주말 또 다시 전시장을 찾을 것 같다. 화사한 봄볕에 길을 나서는 여성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또 집에서 갈 곳 몰라 하고 있을 남성들을 문화의 현장에서 함께 만나길 바라며.
박철화 문학평론가ㆍ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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