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월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국가 경제력 지표인 국내총생산(GDP)과 국민 행복의 상관관계가 급속히 감소함에 따라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GDP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수를 고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여년 전 영국 사상가 토마스 칼라일로부터 ‘우울한 과학’이라는 비아냥을 받은 경제학이 마침내 행복에 눈을 떠 실질적인 삶의 만족도를 잘 드러내는 ‘행복지수’ 개발에 나섰다는 것이었다. GDP 규모가 행복수준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이에 집착하는 정부정책의 유효성은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 이른바 ‘행복 경제학(Happiness Economics)’ 개척에 나선 일군의 미국 경제학자들은 지수개발에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으나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작업이 순탄치 않은 모양이다.
임직원의 만족도와 생산성 간의 상호작용에 관심이 많은 기업까지 나서 연구비를 제공했지만, 주관적이고 모호하며 상황에 따라 변하는 ‘행복’을 수치로 잡아내기 쉬울 리 없다. 그래도 ‘인간의 체취’가 사라진 경제학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으려는 이들의 실험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때마침 요즘 하버드대의 최고 인기 강의가 킹스필드 교수의 계약법이 아니라 유대인 심리학 강사 벤-샤하르의 ‘행복학’이라는 기사가 나왔다.(본보 3월14일자 2면)
엄청난 과제물과 시험에 시달리는 하버드생들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의 강의는 “행복하고 건강한 삶의 비결은 책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것이 요체다. 그래서 명상이 곧 수업인가 하면 ‘8시간 이상 수면’이 과제물이기도 하다.
엄한 학풍을 훈장처럼 여기는 노교수들에겐 그가 눈엣가시 같겠지만 학부생 5명중 1명 꼴인 550명이 그의 강의를 듣는다면, 행복 없는 법학이나 경제학의 미래는 어둡다.
▦ 월스트리트 저널은 얼마 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과학적 연구성과를 마케팅에 도입해 실적을 크게 올리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구매를 망설이는 고객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면 곧바로 매출로 연결되는 ‘행복 마케팅’이 뜬다는 것이다.
삶이 파편화 혹은 원자화 하는 디지털시대일수록 아날로그적 행복이라는 화두가 더욱 부각되는 추세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불붙은 양극화 논쟁도 궁극적 목표는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넓히자는 것일 텐데,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인 것처럼 적개심으로 가득찬 주장만 횡행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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