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의 ‘따뜻한 복지’라는 슬로건이 어필하지 못한 것은 이 후보의 실제 의지와 무관하게 대중이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의 삶이 믿음을 주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고졸 출신인 노무현 후보였다.
한나라당이 2003년 전당대회 후 1년도 안돼 대표교체 파동을 겪으며 오히려 주저앉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중은 5,6공을 거치며 장관만 두 번을 한 최병렬씨를 대표로 뽑은 한나라당의 환골탈태 다짐을 믿지 않았다.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느냐는 중요치 않다. 진정성을 갖고 있느냐도 두 번째 문제일 수 있다. 대중이 보는 것은 살아온 길이다. 그것이 실체가 애매한 이미지일 따름이라도 할 수 없다. 여론은 그런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라당은 여전히 영남당이며 엘리트 중심 당이고, 서민 보다는 중산 층 이상을 편드는 당이다. 그 동안 나름대로 부정적 이미지 탈피를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말이다.
문제는 이념 보다 사람과 풍토다. 한나라당에는 개혁과 서민, 비(非) 영남을 외치는 사람들의 역할공간이 별로 없다. 대세와 다른 말을 하면 “여당에나 가라”는 저주를 듣기 일쑤다. 당 저변을 지배하는 것은 민정계 정서다. 2004년 총선 공천 때부터 줄곧 소장 개혁파의 표적이 돼 왔던 정형근 의원이 지난해 말 중앙위의장 선거에서 여유 있게 재선된 것은 더 이상의 예시가 필요 없는 한나라당의 현 주소다.
당내 차기 대선 레이스가 같은 TK(대구 경북) 출신인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의 맞대결로만 전개되는 것도 상징적이다. 이런 마당에 아무리 서진(西進)을 외치고, 낮은 곳을 향하겠다 한들 진심을 알아줄 이는 별로 없다.
이 같은 편향성은 대선에서 치명적 약점이 될 것이다. 중간 세력의 표를 얻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한나라당이 잘 나가는 것은 현 정권의 무능과 오만으로 상당 수 중간층이 야당쪽에 선 덕분이지만, 상대가 달라질 대선에서도 그럴 것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여권은 이미 국민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대선 캠페인을 시작했다. 청와대와 여당이 대책은 내놓지 않고, 양극화의 실상을 부각하는데 경쟁적으로 나서는 것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갈라놓기 위한 선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여당 원내대표라는 사람이 실업고를 찾아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기는커녕 ‘강남, 강북’ 운운하며 소외감을 부추기는 장면에선 벼랑에 몰린 정권의 단말마가 느껴진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이에 맞설 역량이 없다.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한나라당의 이미지가 사람과 문화의 치우침 때문에 양극화 해결과 거리가 있는 탓이다. 여권의 수법은 저열해도, 양극화는 엄연한 현실이므로 대중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리고 여권의 계략과 무책임을 지적하는 한나라당에 대해선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손학규 경기지사를 정점으로 한 수도권, 개혁성향, 중도 세력이 구석에 처박힌 불균형 구조로는 여권의 파상공세를 견뎌낼 수도, 다양한 표를 모을 수도 없다. 그들의 힘이 모자라다면 일으켜 세워주기라도 해야 할 텐데, 의원들의 관심은 당장 누가 더 센 주자인지에만 가 있다.
유성식 정치부 차장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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