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뉴스전문 케이블채널 CNN의 심야 토크쇼 ‘래리 킹 라이브’의 사회자로 본명은 로렌스 하비 자이거. 부모는 러시아에서 이민 온 유태인이며, 래리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자랐다.
고교 졸업후 마이애미로 간 그는 처음에는 청소와 잡일을 하다가 기회를 잡는다. 래리는 디스크자키, 뉴스 및 스포츠 캐스트 일을 하며 55달러의 주급을 받게 된다. 이 즈음 본명이 너무 에스닉하고 기억하기 어렵다는 충고를 받아들여 이름을 래리 킹으로 바꾼다.
1970년대 후반 자리를 옮긴 래리는 심야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는 라디오 생방송 토크쇼 일을 맡아 점차 유명해진다. CNN이 개국하면서 래리의 TV 토크쇼가 시작됐는데 그는 포드 이래의 모든 미국 대통령들, 고르바쵸프, 푸틴, 마가렛 대처, 토니 블레어, 말론 브란도, 프랭크 시내트라, 모니카 르윈스키 등과 인터뷰했다.
CNN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즈음부터 시청률 경쟁에서 극우 성향의 ‘폭스 뉴스’에 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쇼는 지금도 하루 평균 100만 명의 시청자 수를 유지하고 있다. 래리는 2005년 연봉 700만 달러에 4년 장기계약을 했다. 그의 인터뷰 스타일은 그다지 공세적이지 않으며 방송 도중 개인 의견을 가장 적게 말하는 사회자로 꼽힌다. 그가 원하는 최고 인터뷰 대상은 기독교의 하느님, 준비된 첫 질문은“당신에게 아들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재현(이하 현): 오늘 손님은 무려 4만 명과 인터뷰한‘마이크의 달인’이자 많은 상을 탄 저널리스트이며‘라디오 명예의 전당’에 봉헌돼 있는 분이다. 그는 66세의 나이에 7번째 부인으로부터 아들을 얻은 정력가이며, 무엇보다 씀씀이 좋은 기부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용비행기로 로스앤젤레스에서 날아와 지금 독자 여러분 곁에 있다. 하이, 래리. 나와줘서 고맙다.
래리 킹(이하 킹): 나도 기쁘다.
현: 야구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미국 성적이 나빴다.
킹: 미국팀 성적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한일전의 경우 1패를 한 팀이 아니라 3패를 한 팀이 결승에 올랐다. 하지만 이번에 한국팀은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런 국제경기에서 같은 팀에게 3연승을 하기란 확률적으로 매우 어려운 법이다. 원래 야구는 다른 경기에 비해 확률이 많이 작용하는 게임이다. 월드컵에서도 한국팀의 선전을 빈다.
현: 국민 모두를 대신해 감사한다. 그런데 오늘 당신을 부른 것은 야구 얘기보다는 당신이 세계에서 가장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한국에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영어는 그 자체로 가장 중요한 권력 자원이며, 계급 구조의 재생산 도구가 돼 있다. 게다가 5월부터는 토익과 토플의 시험 방식이 바뀔 예정이라 요즘 대학가는 난리다.
킹: 토익, 토플과 내가 무슨 상관인가?
현: 바뀌는 방식에서는 듣기와 말하기가 중요해진다. 한국 직장인과 대학생들에게 듣기 학습이라면 단연 CNN인데, 특히 토크쇼는 시사 영어와 구어체 영어의 이점을 모두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킹: 한국의 영어 실력은 어떤가? 야구 실력과 비슷한가?
현: 그런데 어느새 주객이 바뀌었군. 토익과 토플 모두 100위 바깥이다. 한국의 경제력, 정치적 활력과 비교하면 너무 대조적이다.
킹: 사회 구성원 모두가 영어를 꼭 잘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영어든 한국어든 간에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는 게 우선이다.
현: 난 생각이 다르다. 예컨대 한국은 세계 최고의 토익 소비국이다. 한 해에 180만 명 넘게 토익 시험을 본다. 하지만 토익 주최측은 시험 문제나 채점 기준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킹: 당신네 대입 수능시험과는 매우 다르구나. 왜 항의해서 고치지 않는가?
현: 영어 자체가 권력이다. 내 말은 한국 사람 모두가 영어 문제에서는 노예라는 거다. 굴종에 익숙한 노예가 어떻게 항의를 하겠는가. 야구 경기와는 전혀 다른 얘기다.
킹: 토익은 비즈니스에 초점을 둔 데다 극히 제한된 방식의 시험에 불과하다. 토익이 영어 실력을 온전하게 측정할 수는 없다. 내가 토익 시험을 본다고 해서 860점이 넘는다는 보장이 없다.
현: 그래서 상당수 회사들이 토익이 아닌 대안을 찾고 있다. 영어 글쓰기라든가, 말하기 실력을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시험을 선호하는 회사들이 늘어난다. 하지만 서울 다운타운의 많은 사설 학원은 여전히 토익 강좌로 떼돈을 벌고 있다. 대학생들은 학원에서 정답 찍는 법을 배운다.
킹: 냉전 해체 이전에는 우리나라의 CIA가 영어를 전 세계에 보급하기 위해 비밀리에 막대한 예산을 지출했었는데 이제는 당신들 스스로 각자 알아서 많은 돈을 쓰고 있구나. 그런데 한국에는 꾸준히 공부하는 것 말고 영어 학습법이 특별히 따로 있는 거냐?
현: 암 치료의 민간요법이나 다이어트 방법의 수보다도 많은 영어 학습법이 난무하고 있다. 한 달에 영어 학습 서적이 무려 90종 가까이 출간되고 있다.
킹: 그럼, 사회 전체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제출돼 있는가?
현: 영어 공용화론이 있다.
킹: 거기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무엇인가?
현: 예전에는 결사 반대였는데 한국일보 기획 기사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킹: 영어 공용화론을 공약으로 내거는 정치인이 있는가?
현: 아직 없다. 그래서 정당을 만들어 볼까 생각 중이다.
킹: 정당을?
현: 가칭 ‘영어교육 혁명당’같은 것 말이다. 전경련과도 물밑 작업을 함께 하고 있다. 국민들이 영어를 잘 하면 재벌에게도 이익이기 때문이다. 다만, 전경련은 당 이름에서 ‘혁명’이란 말을 빼자고 주장하고 있다. 과격해서 싫다는 것이다.
킹: 그래서?
현: 하지만 나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 인류 역사를 훑어보면, 비록 처음은 혁명을 하려고 창대하게 시작해도 나중에는 아주 작은 개혁이 겨우 성취되는 법이다. 영어 문제는 쿠데타를 해서 정권을 잡아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킹: 당신은 정말 과격하다.
현: 문제는 한국 사람이 영어를 못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영어가 한국 사람 거의 모두를 광기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 한국에서는 엄마가 영어 발음을 위해 아이 혀 수술을 시킨다는 것이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많은 중년 남성이 기러기 아빠가 돼 원룸이나 고시원에서 홀아비 노릇을 하고 있다. 직장인과 대학생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또 유치원 아이부터 대학교수까지 영어 과외를 받고 있다. 이건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다. 혁명이 필요하다.
킹: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많은 사람, 주로 흑인들이기는 하지만, 고교 졸업자들 중 상당수가 문맹이다. 언어자본을 포함한 문화자본은 사회의 계급 재생산과 긴밀히 맞물려 있는 법이다.
현: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다. 지금 가난한 집 아이들은 구조적으로 영원히 가난하게 살아가게 돼 있다. 질 좋은 영어 교육을 받을 기회가 원천 봉쇄돼 있기 때문이다.
킹: 공교육으로 해결할 순 없는가?
현: 노력하기 따라서는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정당을 만들려는 것이다.
킹: 이번 지방자치선거에 서울시장 후보를 내보내는가?
현: 당연하다. 시간이 촉박해 우선 무소속으로 후보를 낼 생각이다. 후보로는 미국 기업의 한국 현지법인 대표를 맡고 있는 고액 연봉의 한국인 여성 중에서 한 명을 뽑으려 하고 있다.
킹: 그런데?
현: 그 중에서도 딱히 춤을 못 추는 사람이어야만 하는데, 다들 영어도 잘 하고 춤도 잘 춰서 마땅한 사람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
킹: 선거 이슈는 무엇이냐, 역시 영어공용화론인가?
현: 아니다.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되자는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에서처럼 국민투표를 해서 그 신청 여부를 결정하자는 게 우리 당의 제안이다.
킹: 그 계획대로라면 버시바우는 결국 직장을 잃게 되겠구나. 그것 말고 너희 당이 하려는 다른 일은 없는가?
현: 새로운 영어 교육 방법을 개발해서 국민들에게 제시할 참이다. 그것은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해서 최고 수준의 영어 교육을 국민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할 생각이다. 그것도 영역과 수준 별로 쪼개서 말이다. 당신도 은퇴하면 원어민 강사로 채용할 예정이다. 그 다음 시간을 충분히 갖고 각급 학교 영어선생들을 재교육시켜서 본격적인 준비를 하려고 한다. 선생들을 나눠서 미국에 장기 연수를 보낼 계획이다.
킹: 프로젝트 개발에 필요한 자금은 있는가?
현: 삼성에서 내놓은 8,000억을 우선 갖다 쓸 생각이다. 물론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다는 전제에서 하는 얘기다.
킹: 나도 이른 시일 안에 너희 정당에서 미국 주지사가 나오길 희망한다. 아무튼 이거 엄청난 특종감이로구나, 우리 CNN에서 먼저 보도해도 좋겠는가?
현: 멀리서 날아온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나자. 이제, 한국일보 독자들에게 인사해라.
킹: 잘 되길 빈다. 독자 여러분,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문화비평가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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