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겨울, 새 박물관을 채울 사료를 찾고자 한 신문사를 방문한 김진송(47)은 그곳에서 우연히 서류 뭉치를 발견한다. 부통령 이기붕 집의 출입자 명단과, 그들이 가져온 물건이 적혀 있었다.
장부에는 장미, 깨소금, 멧돼지 뒷다리, 병아리, 수박, 바늘쌈지 그리고 열 가지 유럽 과일을 섞어 만든 고급 음료수 ‘씨날코’ 등이 급히 쓴 필체로 적혀있었다. 누가, 몇 시 몇 분에, 몇 개를 가져왔는 지까지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작가, 출판 기획자, 목수 등으로 활동하는 김진송은 호기심을 품고 장부를 분석한다. ‘장미와 씨날코’는 이기붕가의 비밀 장부 분석과 그것을 통해 현대사의 한 순간을 다시 돌아본 책이다.
1959년의 이기붕은, 이승만에 이은 2인자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실력자였다. 그런 그의 집에 사람이 끓는 것은 당연했다. 손에 뭐라도 들고 있어야 아부든, 청탁이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빈 손으로 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기붕 가의 집사 혹은 경호원이 이를 적었고 그렇게 해서 1년 치의 기록이 모였으며 이듬해 4ㆍ19혁명이 일어나 장부가 신문기자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장부에 적힌 날짜와 중요 사건 발생일을 살펴보면 사건의 정황을 알 수 있다. 가령 1월 21일 정치깡패 임화수가 이기붕을 방문하는데 다음날 대한반공청년단이 결성됐다. 심상치 않은 둘의 관계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식의 유추가 맞다면, 결국 장부는 뇌물 목록이 되고, 이름이 적힌 사람은 뇌물 공여자 혹은 추악한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진송은 다른 의문을 품는다. 장미, 멧돼지 뒷다리가 뇌물이 될 수 있을까. 김장철에 배추, 무를 가져가는 것을 나쁘게만 보아야 할까. 그렇다면 뇌물 장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1959년의 일상으로 돌아가 장미와 수박이 당시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고 그 1년 치 신문을 읽어 나간다.
신문 여행을 통해 돌아본 그 때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일을 못 구한 젊은이들이 곳곳에 늘어져 있었다. 영화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지만 극장은 부패의 온상이었다. 극장 주인은 국회의원에게 돈을 찔러 주고 국회의원은 뒤를 봐주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한 쪽에서는 굶는데 다른 쪽에서는 쌀이 남아돌았다.
이권을 따기 위해 편법이 난무했다. 가로채기 때문에 미국의 원조물자는 품귀 현상을 보였고, 사라호 태풍이 남부를 휩쓸었는데도 구호 자금, 구호 물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군에서도 구호 물자, 비료, 시멘트 횡령 사건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도 이승만 정권은 선거 준비만 했다. 깡패와 군인이 활개치고 부정, 부패가 일상화한 나라. 이승만이 그 가운데 있고 이기붕은 바로 아래 있었던 것이다.
비밀 장부가 뇌물 목록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던(혹은 아니기를 바랐던) 김진송은, 신문 읽기를 통해 뇌물 목록이 맞다는 확신을 한다. 보잘 것 없는 물건이지만 부패한 사회에서는 뇌물이, 청탁의 대가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승만이 군림하고 이기붕이 통치한 그 시대는 장미와 씨날코가 뇌물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를 지녔던 것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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