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말, 마지막 타자 다무라 히토시가 헛스윙 삼진을 당하며 일본이 한국에 1-2로 패하자 3루측 더그아웃을 지키고 있던 일본 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전설’ 오 사다하루(王貞治) 감독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초상집 분위기 속에 일본 선수들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한국 선수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오 감독이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선수들을 위로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오 감독과 일본 대표팀이 받은 충격은 16일 경기가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그대로 확인됐다.
오 감독은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한국 투수들이 워낙 뛰어났다”며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오 감독은 “전 선수가 오늘 경기를 이기고 싶어했지만 승리에 대한 한국팀의 염원이 더 강했던 것 같다”며 정신력에서도 패배했음을 시인했다.
“아직도 일본이 아시아에서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오 감독은 “모든 팀이 이번 대회에 최고의 선수를 출전시키다 보니 경기마다 팽팽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국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오 감독은 “만약 미국과 멕시코 경기 결과에 따라 4강에 오를 수 있다면 반드시 한국을 이겨보고 싶다”며 가능성이 희박한 희망사항을 말하기도 했다.
오 감독은 사실 WBC 대회 시작 전 김인식 한국대표팀 감독과의 기세 싸움에서도 밀린 입장이었다. 오 감독은 자신이 직접 나서 메이저리그의 강타자 마쓰이 히데키(뉴욕 양키스), 이구치 다다히토(시카고 화이트삭스), 조지마 겐지(시애틀 매리너스)를 대표팀에 합류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반면, 박찬호(샌디에이고) 이승엽(요미우리) 서재응 김희섭(이상 LA다저스) 김병현 김선우(이상 콜로라도) 등 우리 해외파 선수들은 자진해서 김 감독 휘하로 몰려들었다.
이날 경기는 꼭 이겨야 한다는 정신력, 승리에 대한 집념도 자의에 의한 것이라야 그 힘이 배가된다는 사실을 일본 대표팀이 절감한 한 판 승부였던 셈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오 감독과 동석한 일본 선발투수 와타나베 순스케는 1회 이승엽과의 대결 상황에 대해 “1회 첫 타석에서 이승엽에게 홈런을 맞으면 팀 전체에 미치는 여파가 크기 때문에 걸릴 수 밖에 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시아 예선전 당시의 패배, 이승엽의 연속 홈런 등 한국 대표팀의 상승세에 일본 대표팀이 얼마나 주눅들어 있었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일본이 4강에 오르려면 17일 열리는 미국-멕시코전에서 미국이 3실점 이상을 멕시코에 내주고 져야 한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정상에 오르겠다던 일본은 마지막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미국-멕시코전을 지켜봐야 하는 신세가 됐다.
애너하임=이승택 기자 l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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