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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3> 오늘 로체샤르 등정 장도 엄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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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3> 오늘 로체샤르 등정 장도 엄홍길

입력
2006.03.16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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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4일 오후 3시. 나는 엄홍길(46)과 함께 남체 바자르에서 북동쪽 25㎞ 거리에 있는 한 5,000㎙급 무명봉 위에 올라 있었다.

일반 트레커들이 갈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인 추쿵(3,730㎙)에서 두 시간쯤 떨어져 있는 곳이다. 풍광이 수려하기로 유명한 쿰부히말 지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장쾌하게 펼쳐진 설산들의 파노라마가 절로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물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서슬 푸르게 깎아지른 로체(8,516㎙)와 로체샤르(8,400㎙)의 남벽들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엄홍길은 이 천상의 절경 앞에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낮은 음성으로 불경을 외더니 배낭 안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임자체(6,189㎙) 등반을 하루 앞두고 고소 적응을 겸한 정찰쯤 되겠거니 하고 받아들였던 나의 예상이 깨지는 순간이다. 그는 로체샤르 남벽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앉아 정성스레 두 잔의 술을 올렸다. 그리고 붉어진 눈시울을 닦으며 신음처럼 내뱉은 그의 탄식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내가 죄가 많은 놈이야...내가 산에 다니면서 업(業)을 많이 지었어...”

2003년 10월 5일 낮 12시 20분. 엄홍길은 로체샤르의 남동릉을 통하여 8,250㎙까지 진출해 있었다. 2001년 악천후 때문에 7.600㎙까지 진출했다가 패퇴했던 쓰라린 기억을 깨끗이 지워버릴 설욕전의 성공이 바로 코 앞에 닥쳐 있었던 것이다. 70도가 넘는 경사의 빙설벽 트래버스 구간이 나오자 그때까지 후미를 맡았던 젊은 대원들 둘이 선두를 자청하고 나섰다. 박주훈(당시 35)과 황선덕(당시 27)이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트래버스 구간을 무사히 통과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상까지 연결되어 있는 150㎙의 대암벽 구간뿐이다.

선등자가 대암벽 구간에 달라붙었다. 나비처럼 날렵한 모습이다. 후등자가 확보를 보던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워낙 가파른 절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쩡!”하는 굉음과 함께 이 절벽에는 지옥이 들이닥친다. 판상(板狀) 눈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히말라야 벽 등반 도중 판상 눈사태를 맞으면 백약이 소용없다.

그 순간 누군가 소리를 질렀는데 그것이 “아악!”하는 비명소리였는지 “추락!”이라는 외마디 절규였는지 엄홍길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본능적으로 벽에 몸을 붙이며 자일을 움켜잡았을 뿐이다. 하지만 3,000㎙ 아래로 추락하는 두 대원의 체중을 낚아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눈사태는 이미 골짜기 아래까지 내려가 하얀 설연이 피어오르는데...장갑은 순식간에 타들어가 내 손에서 핏물이 배어나는데...핏물을 머금은 우모(羽毛)들이 내 눈 앞에 둥둥 떠다니던 풍경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박주훈과 황선덕은 그렇게 갔다. 하지만 사고 당시 엄홍길은 그들의 죽음을 실감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그곳은 히말라야 8,250㎙ 지점이다. 그는 이제 70도 경사의 빙설벽을 트래버스하여 되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의 손은 이미 피로 물들었고 그에게는 자일이 없다.

엄홍길은 그때의 트래버스를 ‘생애에서 가장 길고 끔찍했던 등반’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트래버스를 끝내고 마침내 주저 앉을 만한 공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후배들의 죽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파랗게 굳은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고 하염없이 흐느끼는 것뿐이었다.

2000년 7월 31일 오전 6시 30분. 엄홍길은 K2(8,611㎙) 정상에 섰다. 그가 오른 14번째 8,000㎙급 정상이었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였고, 인류역사상 8번째의 대기록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오를 산이 없는’ 히말라야 등반가로서 남은 여생을 명예와 축복 속에 편히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14+2 완등’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다. 위성봉에서 점차로 독립봉으로 인정되는 추세에 있는 얄룽캉(8,506㎙)과 로체샤르를 마저 오르겠다는 것이다. 산악계 안팎에서 찬반양론이 들끓었다. 어떤 이는 그를 칭송했고 다른 이는 그를 폄하했다. 과연 그는 왜 히말라야 등반을 멈출 수 없는 것일까?

그는 일생 일대의 목표를 성취했다는 기쁨보다는 허탈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한 동안 그는 술만 마시면 먼저 간 산 친구들이 보인다며 괴로워했다. 엄홍길은 그의 자서전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에서 이렇게 말한다. “혼자만 따뜻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찬 얼음벽 속에 갇혀 숨진 동료들에게 미안한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업이 쌓여 나는 영원히 산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2006년 3월 10일 밤 9시. 지난 해의 휴먼원정대원들과 올해의 로체샤르 남벽원정대원들이 서대문의 한 선술집에서 마주 앉았다. 되돌아올 대답을 뻔히 알면서도 내가 물었다. “거길 꼭 가야만 되겠어?” 엄홍길은 의연하게 씨익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주훈이랑 선덕이랑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데...내가 걔들을 대신해서라도 로체샤르에는 꼭 올라가야지!” 어떤 사람들에게 산은 단순한 등반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그곳에 있을 때에만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한다. 그곳을 하루 아침에 등지기에는 그 동안 쌓아온 업보들이 너무도 많다. 엄홍길에게 히말라야는 꼭 그런 곳이다.

2006년 3월 16일 밤 9시. 엄홍길이 이끄는 ‘2006 한국 히말라야 로체샤르 남벽원정대’가 장도에 오른다. 이미 2004년에 얄룽캉 정상에 올랐으니 그가 제시한 ‘14+2 완등’계획의 마침표를 찍으러 떠나는 셈이다. 대원 6명의 단촐한 규모이지만 사기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드높다.

그의 21년 히말라야 인생에 ‘화룡점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몹시 아쉽다. 뒤에 남은 사람은 다만 그들의 안전등반과 무사귀환을 기원할 뿐이다.

▲ 로체샤르 남벽이란?

로체는 에베레스트(8,850㎙)의 남쪽에 있는 세계 제 4위 봉이다. 사우스콜(8.000㎙)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에베레스트이고, 오른쪽으로 오르면 로체이다. ‘로체’라는 말은 티베트어로 ‘남쪽에 있는 커다란 산’을 뜻한다. 또 로체샤르(8,400㎙)에서 ‘샤르’란 ‘동쪽’이란 뜻이기 때문에 로체샤르는 곧 로체의 동쪽에 있는 산을 의미한다.

로체샤르는 오랫동안 로체의 위성봉처럼 여겨졌지만 현재는 점차 독립봉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이다. 한때 로체 역시 에베레스트의 위성봉처럼 인식되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한국인이 최초로 8,000㎙를 돌파하여 올랐던 산이 바로 로체샤르이다. 1971년 대한산악연맹의 최수남 대원이 8,200㎙까지 진출했으나 기상악화로 철수했던 기록이 있다.

여지껏의 로체샤르 등반은 대체로 남서릉이나 남동릉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번에 엄홍길은 대담하게도 남벽을 선택했다. 로체샤르 남벽은 ‘세계에서 가장 험난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로체 남벽과 나란히 붙어 있다.

벽의 수직 표고차가 3.000㎙ 이상이고, 잦은 눈사태와 낙석, 그리고 티베트 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으로 인해 극한상황을 자주 연출한다. 아직까지 남벽을 통하여 로체샤르 정상에 오른 한국원정대는 없다. 엄홍길은 자신의 16번째 8,000㎙ 산으로 가장 혹독한 조건의 루트를 선택한 셈이다.

산악문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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