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30일 밤 도박장에 돈을 대주고 고리를 받는 속칭 ‘꽁지’로 일하던 김모 여인이 울산 우정동 자신의 집에서 잔인하게 살해됐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청산염이 든 약을 마시고 사망했으며 발견 당시 옷이 모두 벗겨진 상태였다.
턱과 목 주위에는 흉기에 26군데 찔린 자국도 보였다. 현장에는 지문 등 증거가 될만한 단서는 없었고 보석 등 귀중품은 그대로 있었다. 범행 수법으로 볼 때 원한이나 치정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얼마 뒤 김씨의 집 근처에 사는 사채업자 최모(54ㆍ여)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경찰이 수집한 증거들은 최씨를 범인으로 확신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살해된 김씨의 집에서 불과 22㎙ 떨어진 하수구에서 청산염이 든 100㎖ 약병과 최씨의 침이 묻은 75㎖ 약병이 범행에 사용된 칼과 함께 비닐봉지에 쌓인 채 발견됐다.
숨진 김씨의 수첩과 신용카드 도 최씨의 집 담 밑에 버려져 있었다. 더구나 김씨의 시체 옆 머플러 밑에서 최씨의 침이 묻은 담배 1개비가 발견되기도 했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최씨가 김씨에게 청산염이 든 약을 마시게 해 살해했다고 추론했다.
하지만 최씨는 시종일관 범행을 부인했다. 자신은 범행 시간에 이웃집에 사는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고 이튿날 김씨 집을 찾아갔다가 숨진 사실을 알게 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이 제시한 증거들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자신이 마시고 버린 약병을 주워 범행에 사용한 청산염이 든 약병과 함께 버린 것이라고 반박했다. 숨진 김씨의 수첩과 신용카드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했다. 담배는 자신이 시체를 발견한 뒤 물고 있다가 두고 온 것이라고 항변했다.
1심과 항소심 재판부는 기록상 최씨의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런 자료가 없는 데다 진술을 자주 번복해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유죄를 인정, 최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살해 동기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과학적 증거들에 의해 범행을 ‘간접적으로’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1부(주심 양승태 대법관)는 15일 “증명력의 한계가 있는 간접증거만 있고 피고인이 범행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발견되지 않는다”며 원심판결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피고인과 피해자의 행적을 면밀히 조사해 범행을 실행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지, 살해 동기가 충분했는지 등에 대해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아야 한다”며 “이 사건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연출한 의심이 드는 만큼 간접증거의 증명력이 매우 떨어진다”고 밝혔다.
■‘치과의사 모녀 살인’은 무죄→유죄→무죄
대법원 판례를 보면 간접증거가 범행에 대한 혐의를 두기에 충분하다 해도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력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만큼 판단이 쉽지 않다는 뜻이고 실제로 판결이 뒤집어진 사례도 있다.
과거 이용훈 대법원장이 내린 판결이 대표적이다. 1996년 서울서부지법은 치과의사인 아내와 한살배기 딸을 살해한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에 대해 남편 이모씨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범행을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 대법원장은 대법관 시절인 1998년 11월 “범죄사실에 대한 증명은 논리와 경험칙에 합치되는 한 간접증거로도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며 항소심에서 내린 무죄판결을 깨고 유죄취지로 파기 환송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결국 재심리 끝에 2003년 2월 무죄로 확정됐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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