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은 분명 어딘가 이상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바로 잡을 수가 없다. 내 작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10년 전부터 알츠하이머에 시달려 온 미국 화가 윌리엄 어터몰렌(73)은 자화상만 그린다. 뇌를 갉아 먹는 병마가 화필을 가로막으려 하지만 그의 창작 욕구까지 꺾지는 못했다.
어터몰렌이 2000년까지 그려 온 자화상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 뿐이다. 그러나 화가가 병마와 싸우면서 느꼈을 분노와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발병 초기 자화상은 공포와 고립감을 담고 있다. 이후 저항과 분노에서 부끄러움과 혼란, 고통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혼란스러운 붓 자국만 남아 있는 완전한 자아 상실로 끝을 맺고 있다.
어터몰렌의 자화상은 알츠하이머의 진행과 그에 따른 창작능력 손상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학적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필라델피아 의대 안얀 채터지 박사는 “단순한 좌뇌, 우뇌론이 아니라 사람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뇌의 매우 다른 부분들을 이용한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인간의 뇌가 손상돼 가는 과정이 그대로 표현돼 있는 그림을 보는 것은 그것 자체로 숨막히는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면역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어떻게 사람이 창작 활동을 계속하는지를 그는 보여주고 있다”며 감탄했다.
뉴욕과 유럽의 갤러리에서 호평 속에 판매됐던 어터몰렌의 자화상은 필라델피아 의과대학에서 다음달 30일까지 전시에 들어갔다. 주최측은 알츠하이머를 처음 발견한 독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 박사와 어터몰렌의 삶을 기념할 목적으로 기획했다.
론다 소리첼리 박사는 “알츠하이머를 두려워 하는 상황에서 이런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환자와 가족, 의사, 대중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어터몰렌은 병을 앓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런던을 중심으로 신화와 일상 생활을 소재로 삼은 표현주의 작품을 그려 큰 명성을 얻었다. 런던 북부 유대교 예배당과 병원 벽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현재는 의사소통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런던의 요양소에서 부인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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