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대 경영학과 3학년 이모(21)군은 지난 겨울방학 내내 서울 종로의 한 어학원에서 ‘영어집중코스’를 수강했다.
토익(TOEIC)ㆍ토플(TOEFL)에 대비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지난해 ‘영강’으로 들었다가 C학점의 실패를 맛봤던 교양과 전공 과목 1개씩을 재수강하기 위해서다. 영강은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뜻하는 캠퍼스 은어. 영어 과목이 아닌 다른 과목에까지 영어로 가르치는 강의가 대학마다 봇물을 이루면서 생겨난 말이다.
이군은 “내용 이해는 둘째 치고 발표나 토론이 안돼서 수업을 들으며 고생을 많이 했는데 점수까지 나쁘게 받았다”며 “해당 과목 내용에 대한 성취도가 아니라 영어 실력에 따라 성적이 달라지는 것 같아 속상했다”고 말했다.
주요대가 경쟁력 강화, 학문의 세계화 등을 이유로 일반 과목에 대한 영어강의의 비중을 크게 늘리면서 캠퍼스에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영어강의에 부담을 느끼는 학생들이 이를 피하려고 일정 과목에 몰려 수강신청 전쟁이 벌어지고 강의에 나서야 할 교수들은 영어 과외를 받기도 한다.
해당 강의 내용과 영어 실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게 대학의 설명이지만 영어강의가 지나치게 확대되고 영어 실력 지상주의에 치우칠 경우 자칫 대학이 영어학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고려대는 올해부터 전체 개설 강좌 중 영어강의의 비중이 30%를 넘어섰고 2010년까지 비중을 50%대로 늘려갈 예정이다. 영어강의 비중이 17%인 연세대나 10% 내외인 성균관대ㆍ이화여대도 수 년 내에 30~50%의 수업을 영어강의로 채워나갈 방침이다.
군 복무 후 이번 학기에 복학한 고려대 정경대 최모(25)군은 “학교에 돌아와 보니 몇몇 전공수업이 영어강의로 지정돼 경악했다”고 말했다. 영어에 자신 없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어로 수업을 듣는 부담을 피하려고 하면서 학기초마다 반복되는 수강신청 경쟁도 한층 더 치열해졌다.
예전엔 수강 신청 홈페이지가 열리자마자 학점 관리에 유리한 소위 A폭격기 과목들부터 마감됐지만 요즘은 한국어로 진행되는 강좌부터 초고속 마감이 된다.
이런 고충을 감안해 대학들은 영어강의를 비교적 탄력적으로 운용해 학생들이 받는 충격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강의는 영어로 진행하되 리포트나 시험은 한국어 사용을 묵인해 주는 식이다.
강의 중간중간에 교수가 우리말로 핵심을 요약해주면서 청취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배려하기도 한다. 연세대의 경우 아예 3시간 수업 중 1시간은 한국어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교수들도 영어강의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고려대 관계자는 “영어강의 도입 및 확대 과정에서 학생보다는 교수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말했다. 영어강의에 찬성하는 젊은 교수들과 그렇지 않은 중견 교수들, 영ㆍ미권 유학파와 유럽ㆍ아시아권 유학파들 간에도 의견이 엇갈린다.
이렇다 보니 부담을 느낀 교수들은 과외수업을 받기도 한다. 고려대 교수 18명은 지난 겨울방학 동안 비밀리에 원어민 강사로부터 영어강의법 지도를 받았다.
학생들은 적응하기 쉽지 않고 학업 부담이 늘어나 고충을 토로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취업과 자기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 순응하는 분위기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아직은 영어강의가 모든 학생들에게 강제화해 있지 않다”며 “설문조사 등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지만 학생회가 나서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밝혔다.
그러나 영어강의 확대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연세대의 한 교수는 “영어강의에 들어오는 학생의 절반은 ‘비자발적 수강인원’이다 보니 강의 첫 주에 나오는 학생의 20% 정도가 수강신청 변경을 하고 빠져 나간다”며 “학생들의 수업 흥미도나 몰입도를 떨어뜨리지 않는 수준에서 비율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이종구 교수는 “강의 내용에 담긴 정보의 양과 질이 문제이지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느냐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국사학이나 체육학 수업을 유창한 영어로 강의한다고 무엇이 나아지겠느냐”고 반문했다.
정철환 기자 ploma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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