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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사망 밀로셰비치는… '인종청소' 다행 극단적 민족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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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사망 밀로셰비치는… '인종청소' 다행 극단적 민족주의자

입력
2006.03.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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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구치소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64) 전 세르비아 대통령은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1990년대 발칸을 피로 물들였다.

2000년 권좌에서 쫓겨나기까지 13년간 유지했던 밀로셰비치의 권력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밀로셰비치는 ‘민족주의 지도자’로 기억되지 않는다.

구 유고연방이 갈갈이 찢겨나가는 와중에 ‘인종청소’를 자행, 무려 20만 명을 숨지게 만든 ‘발칸의 도살자’로 기억된다.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보스니아 내전을 끝낸 데이턴 평화협정의 당사자로서 ‘발칸의 피스메이커(peacemaker)’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지만 잠시, 99년 다시 코소보 전쟁을 촉발시켰다.

BBC 방송은 밀로셰비치를 ‘민족주의’를 이용한 ‘정치적 기회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밀로셰비치가 유고 연방내 세르비아공화국 대통령으로 권력을 잡은 89년 당시 유고에서는 80년 사망한 요시프 티토 대통령의 그림자가 걷히면서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싹트고 있었다.

유고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ㆍ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ㆍ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로 해체되는 과정 속에서 밀로셰비치는 대 세르비아의 재건을 내세우며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가 91년과 92년 각각 독립을 선언하자, 그는 두 곳에서 소수파가 되면서 위기감이 높아진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무장을 지원했다. 크로아티아에는 유고 군대를 보내 영토의 3분의1을 점령했고 2만명 이상을 희생시켰다. 보스니아는 더욱 처참하게 짓밟았다.

95년 세르비아군이 함락시킨 이슬람계 도시 스레브레니차에서는 세르비아계가 무슬림 7,000여명을 무차별 인종청소하면서 밀로셰비치는 미국 등으로부터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결국 경제제재 등 서방의 압력에 진이 빠져 미국의 중재로 데이턴 평화협정을 체결, 3년여만에 전쟁을 끝냈다.

99년 코소보 전쟁은 짧은 발칸의 평화를 무너뜨렸다.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코소보해방군이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선회함에 따라 밀로셰비치는 또다시 전쟁의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코소보는 밀로셰비치를 몰락시킨 결정타가 됐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세르비아 공습으로 밀로셰비치는 패배했다. 전쟁으로 고립이 심화하고 경제도 파탄상태에 빠지자 민심은 등을 돌렸고 그는 2000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밀로셰비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반 인륜범죄 및 학살 등 혐의에 대한 국제전범재판소의 공소는 기각됐다. 하지만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의 연합에서 탈퇴를 앞두고 있고, 코소보는 독립을 위한 최종지위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더욱이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의 주범인 라트코 믈라디치의 체포설이 나오는 등 유고 전범에 대한 심판도 계속될 전망이다.

유럽연합(EU)은 밀로셰비치의 사망으로 전범재판이 차질을 빚을까 우려하고 있다. 코소보, 크로아티아의 지도자들은 죄과를 치르지 못하고 숨진 데 대해 유감을 나타내고 있다. 파트미르 세지우 코소보 대통령은 “밀로셰비치는 코소보 주민과 인류의 적이었다”며 “정의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숨졌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 세르비아 총리는 밀로셰비치의 옥중 사망을 ‘비극’이라고 표현하는 등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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