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하도 좋아서 일 년 내내 이런 날씨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날이 풀리니 아무 버스에나 올라 시내를 한 바퀴 돌거나 한강 다리만 건너보아도 작은 유랑이 된다.
지하철 티켓 한 장으로 천안역까지 나들이 나가시는 할아버지들이 역사에 부쩍 늘어나고, “남도에 갈 때가 되었다”며 자식 내외와의 여행을 계획하시는 아빠는 봄 점퍼를 꺼내 햇볕에 한 번 널자 하신다.
봄이 오니까 수덕사 앞 수덕식당의 산채 정식이 먹고 싶어서 아주 죽겠다. 막 뜯어 온 갖은 나물에 표고 볶은 것, 알맞게 끓인 냉이국에 찰진 밥 한 그릇 먹고 절 뒤의 산길이나 걷다오면 그만이겠다.
시장에 나가면 미나리, 쑥, 쑥갓, 곰취, 취, 고구마 줄기, 깻잎 줄기가 수북이 쌓여있고, 한 줌 사면서 “할머니, 이거 어떻게 먹는 거예요?” 하고 새댁 태를 내어보면 ‘볶아라 무쳐라’하는 나물장사 할머님의 묵은 레써피까지 받을 수 있다.
봄이 더 무르익으면 이제, 과일들도 예 한몫을 더할 텐데. 딸기는 물론이고 앵두나 버찌에 물 건너 온 체리까지 보기만 해도 예쁘게 붉어서 침은 더 고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울긋불긋하고 향긋향긋하고 간질간질한 봄을 사철 옆에 두고 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과일잼
잼이나 젓갈, 과실주의 공통점은 시간을 가둬 두고픈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즘처럼 냉장고도, 하우스도, 방부제도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식생활을 몽땅 제철 식재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제철 식재료를 쓸 때의 문제점은 철을 맞았을 때에는 가는 곳마다 흔하다가 철이 바뀌면 사라진다는 것인데, 아무리 먹고 싶어도 일 년을 통째로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서 나온 옛 이야기가 효자가 병든 노모를 위해 한겨울에 딸기를 찾아 헤매었다는 둥의 스토리 아닌가? 그 때 그 효자가 딸기잼 만드는 방법만 알았어도, 물론 생 딸기의 탄력은 따를 수 없지만 눈 덮인 산을 헤매지는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잼 만들기는 의외로 간단한데 과일과 펙틴, 이 두 가지에다 설탕과 물만 부으면 된다. 펙틴은 과일 껍질 안에 숨겨진 수용성 섬유질로 특히 사과 껍질에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펙틴은 산과 당을 만나 걸쭉하게 불리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을 주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이어트에 좋고, 또 나트륨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인스턴트식품의 섭취로 쌓인 독소 배출에 탁월하다.
서양의 요리 사전을 뒤지면 잼, 젤리, 마멀레이드, 꽁피(confit)라하여 과일에 당을 넣어 만든 가공 식품의 종류를 적어도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차이점은 과일의 형체가 어느 정도 남아있는가로 따지면 쉽다.
꽁피는 데쳐낸 과일에 당을 부어가며 조금씩 당장(糖藏)하는 방법으로 가열 시간이 적어 과일의 형체가 가장 제대로 보존된다.
나머지 세 가지는 설탕과 물을 붓고 펙틴을 첨가하여 끓이는 방법을 쓰는데, 오렌지와 같은 감귤류를 써서 그 껍질이 끝까지 남아 있으면 마멀레이드, 사과나 딸기와 같이 껍질 또는 씨가 끝까지 남아 있어서 과육이 어느 정도 씹히는 상태를 잼으로 친다. 황도 복숭아 통조림에 코냑을 조금 넣어 약한 불에 졸이면 과육이 흐물흐물해지고, 잼 상태와 비슷해지는데 이것도 빵에 발라 먹으면 별미다.
과일을 블렌더에 갈거나 농축액을 이용하여 펙틴과 당으로 굳힌 것을 젤리라 한다. 그래서 젤리는 다소 인공적인 냄새가 나기도 한다.
▲ 사과잼을 곁들인 매운 닭
어느 세월에 잼을 만들어 먹느냐 생각한다면 일단 한 번 해보시라고 권하는 바이다. 남아도는 과일이나 떨이로 얻은 과일이 얼마나 멋진 맛으로 변하는지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만들면 낭비 없이 정성으로 만드는 음식에 대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고, 좌절할 만큼 힘든 일이 있는 사람이 잼을 만들다 보면 그 노동의 단순성에 의해 실의도 잠시 잊고 또, 버려질 뻔했던 사과가 멋진 잼으로 패자 부활하는 것을 보면서 용기를 얻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강권해 본다.
우여곡절 끝에 잼 한 병을 만들게 되었다면 이제 이것을 어디에 쓸 수 있을까? 빵이나 크래커에 발라 간식으로 삼을 수 있겠고, 아이스크림이나 플레인 요거트에 곁들여 맛을 더할 수 있겠다. 팬케이크나 프랑스식 밀전병인 크레페를 부쳐서 그 위에 발라도 좋고, 고기 요리를 할 때 설탕 대신 조금 넣거나 로스트 비프처럼 밍밍한 고기로 샌드위치를 만들 때에 곁들이면 감칠맛을 낸다.
요리 한 접시 안에서의 밸런스를 중요시하는 프랑스 식(食)에서는 이렇게 만든 잼이나 마멀레이드, 꽁피를 매운 요리와 곧잘 곁들여 내는데, 단 맛이 매운 맛을 상쇄시켜 주기 때문이다.
오늘 만들어 본 매운 닭요리는 고추 분과 커리 파우더, 후추에 칠리소스까지 발라 구운 눈물이 나는 맛이지만, 곁들인 사과 꽁피가 들큰한 맛이 나서 번갈아 먹으면 ?맛의 대조가 재미있다. 향신료를 많이 먹는 아랍 사람들도 자극적인 맛의 요리를 먹고 난 다음에는 달디 달게 탄 민트 차를 마시는데, 역시 단맛과 매운 맛의 입 안에서의 조화를 위함이다.
지난 철에 딴 버섯을 말려뒀다가 봄에 쓰고, 봄에 본 앵두를 술로 담가 늦여름에 마시고, 철 맞아 싱싱한 서해 조개 한 바가지를 염장하고 양념하여 가을 밤 콩나물국에 곁들여보자. 우리는 시간을 멈출 힘이 없다. 하지만, 정성과 낭만을 더한다면 시간을 간직하고 되새길 수는 있을 것이다.
푸드채널 ‘레드쿡 다이어리’ 진행자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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