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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커버스토리 - 정선 '추억의 박물관' - 이색 전시회 '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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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커버스토리 - 정선 '추억의 박물관' - 이색 전시회 '딱지'

입력
2006.03.1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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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성인 남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을만한 추억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1초도 안 걸려 대답이 나온다. ‘군대’다. 그런데 두 가지를 꼽으라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옛 일이어서 아득하긴 하지만…, 그것은 바로 ‘딱지’가 아닐까.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확대 재생산되는 군대의 추억과는 달리 딱지에 대한 기억은 언제부터인가 깊이 묻혀버렸다. 이제는 찾으려 해도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 추억을 찾는 행사가 열린다. 강원 정선군의 함백산 기슭(정선군 신동읍 방제1리)에 위치한 ‘추억의 박물관’(관장 진용선)은 개관 1주년을 기념해 11일부터 5월 31일까지 이색전시회‘딱지의 추억-대한민국 딱지가 다 모였다’를 개최한다. 일제시대인 1930~40년대부터 최근까지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던 딱지가 모두 등장한다.

어른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재미있고 유익한 행사이다. 딱지의 캐릭터를 통해 당시의 문화를 짐작해보거나 종이의 재질과 컬러를 비교하며 우리 인쇄술의 변화를 읽는 것은 덤이다.

아이들의 딱지 사랑에 지역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전시회가 열리는 곳이 하필 강원도 골짜기 정선에서도 험하디 험한 함백산 중턱인가. 이유가 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이 곳은 ‘정말 잘 나가는’ 탄광촌이었다. 대기업 사원 초봉이 30~50만 원 정도였을 때, 탄광 근로자의 월급은 80만 원을 웃돌았다.

‘개도 만 원짜리만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흥청대는 분위기였다. 당연히 아이들의 주머니도 두둑했다. 그러나 뒷산과 앞 개천은 온통 탄가루에 덮여 있었고 놀이시설도 변변치 않았다. 여유는 있지만 심심했던 아이들은 그래서 딱지에 몰입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른 지방의 딱지 놀이와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고 말한다. 200~500장 정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보통이었다. 10명 중 1명은 빼다지(‘서랍’의 정선 사투리)에 수 천 장의 딱지를 보관하는 소자본, 2~3% 정도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 장롱의 긴 서랍을 꽉 채운 대자본으로 구분됐다.

동네마다 ‘지존’이 있어 이 지존끼리의 어마어마한 ‘자본의 통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탄광촌 아이들은 바로 ‘딱지의 무림(武林)’에서 자랐던 것이다.

폐광의 갱도에 남겨 놓고 이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보물을 찾으러 가는 마음처럼, 딱지의 추억을 찾으러 가는 정선행은 그래서 묘한 설레임이 앞장을 선다. (033)378-7856

정선=글ㆍ사진 최규성 편집위원 kschoi@hk.co.kr

■ 아빠랑 같이 쳐볼래? 딱지왕 선발대회도

추억의 박물관(www.ararian.com)의 ‘딱지의 추억-대한민국 딱지가 다 모였다’는 단순히 구경만 하는 행사가 아니다. 해방 전부터 지금까지 아이들 세계의 변화를 느끼고 이해하는 작업이다.

가슴으로 동심으로의 타임머신을 타는 즐겁고 흐뭇한 나들이이기도 하다. 딱지 속에서 코흘리개 시절의 자신을 발견하고 조용히 미소 지을 수 있다면 먼 행차를 한 보람이 있을 듯하다.

전시되는 딱지 중 제일 오래 된 것은 1940년대에 유통됐던 일본 멘코(딱지)이다. 캐릭터는 모두 군인이다. 한창 태평양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본이 아이들에게도 군국주의 의식을 심으려 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일본 멘코의 영향을 받아 군인과 계급장이 주류를 이루는 대한민국 딱지가 50년대 등장했다. 직사각형인 이 딱지는 한국전쟁 후 높아진 군인의 위상만큼이나 인기가 높았다. 이후 군인은 점차 사라지고 을지문덕, 강감찬 등 역사적 위인들이 뒤를 잇는다. 만화영화의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1968년.

TV용 만화영화로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열광케 했던 황금박쥐가 주인공이다. 황금박쥐가 포문을 열면서 우주소년 아톰, 로보트 태권V, 쾌걸조로, 슈러 마리오, 등 80년대까지 만화영화 딱지가 대세를 이룬다. 당시 인기가 없었기에 지금은 더 귀하게 여겨지는 흥부놀부 캐릭터도 있다.

외국의 진귀한 딱지도 많다. 2005년에 발행된 박지성 선수가 등장하는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팀의 축구선수 종이딱지와 1950년 미국에서 제작한 명함 크기만한 만국 딱지가 눈에 띈다.

만국 딱지는 아이들에게 각 나라에 대한 공부를 시키려 한 딱지로 한창 6ㆍ25전쟁을 치르고 있던 우리나라의 딱지에는 전투장면이 그려져 있다.

딱지 외에도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2주 간 토요일마다 추억의 박물관 마당은 떠들썩했다. 4학년 이상의 함백초등학교 학생이 모여들어 동네 딱지왕 선발 대회를 치렀다. 종목은 ‘개딱지를 이용한 딱지치기’이다. 두 번의 선발대회 결과, 무패의 여자 딱지왕 후보가 등장했다. 운동신경이 출중하고 성격이 시원한 현승주(11ㆍ함백초등 5년)양이다.

매일 아빠에게서 딱지치기 비법을 전수받는다고 한다. 왕년에 강릉 임당동의 딱지왕이었던 기자도 현 양과 한 판 붙었다가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망신을 당했다. 전시회 개막일인 11일 최종 선발대회를 열어 딱지왕을 결정할 예정이다. 춘천 매직 포커스 마술단을 초청해 딱지마술을 소개하는 이벤트도 추진중이다.

선물도 마련했다. 1950년대 군인딱지를 다시 제작해 선착순 200명 나누어 줄 계획이다. 200명으로 한정한 이유는 수집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딱지 치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 포스터 1,000장과 딱지 입장권을 별도로 제작했다. 전시회가 만족스러웠다면 덩달아 좋은 기념품이 될 것이다.

박물관 입장료는 따로 없다. 대신 지역 경제를 위해 인근 마을인 신동읍 조동리와 방제리의 모든 상점과 식당에서 2,000원 이상의 상품을 사거나 밥 한 끼를 먹으면 동그란 딱지 입장권을 받을 수 있다.

전시기간은 5월 말까지 거의 3개월이다.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찾아도 좋을 듯. 딱지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정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마을의 하나이다. 게다가 계절은 ‘봄’이다.

박물관에서 30~40분 거리에 아름다운 명찰이 있다. 남한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를 품고 있는 정암사이다. 적멸보궁 뒤 언덕에 놓인 수마노탑, 열목어가 사는 계곡물 등 산 속 부처의 세계를 깊게 느낄 수 있다.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화암관광단지도 유혹적이다. 옛 금광과 석회암 동굴을 조합해 꾸민 화암동굴을 비롯해 화암약수, 화암소나무 등 볼 것이 즐비하다. 신동읍에서 화암관광단지로 넘어가는 길은 정선 소금강을 지나는 길. 길 양쪽으로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펼쳐진다. 가장 아름다울 때는 단풍이 물 든 가을이고, 그 다음이 바로 신록이 피는 봄이다.

글ㆍ사진=최규성 편집위원 kschoi@hk.co.kr

■ 진용선 관장 "나의 어린시절 자화상, 딱지"

딱지 전시회를 기획안 추억의 박물관 진용선(44) 관장의 본업은 아리랑 연구가이다. ‘정선 아라리’는 물론 각 지역의 아리랑 연구로 높은 권위를 인정 받고 있다. 그런 진 관장이 딱지 전시회를 여는 까닭은?

정선 토박이인 진 관장은 1970년대 탄광촌을 주름잡던 딱지왕이었다고 한다. 옛 것을 쉽게 버리지 않는 성격 덕분에 딱지에 대한 추억은 물론, 전시회를 열 정도로 넉넉한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전성기의 재연’처럼 신나는 게 또 있을까. 그는 요즘 여느 전시회를 준비할 때보다 흥분해 있다.

“나이가 들면서 다른 기억은 다 지워져 가는데 유독 딱지에 대한 기억만은 지워지기는커녕 더욱 생생해지는 거예요. 꼭 추억의 딱지 전시회를 열어야겠다고 오래 전부터 마음을 먹어왔죠.”

그의 딱지 사랑은 지난 해 박물관을 개관할 때부터 감지됐다. 박물관의 입장권이 바로 딱지 모양이다. 한 판에 예쁜 그림이 들어간 12장의 딱지를 찍어 1인당 1장씩 입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진 관장은 특히 1960년대 후반에 나온 군인 딱지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가 딱지 무림을 호령하던 바로 그 시절의 딱지이기 때문이다. 모두 잃어버린 줄 알았었는데 최근 우연히 되찾았다.

초등학교 졸업장통(예전에는 졸업장을 둥글게 말아 금속으로 만든 원통에 넣었다)에서 졸업장과 함께 대거 쏟아져 나온 것이다. 아마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딱지계’에서도 졸업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버려도 무방한 종이 조각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딱지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특히 1960년대의 군인딱지는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콜렉터스 아이템이다. 장 당 수만 원을 호가하는 것도 많다. 물론 진정한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이 진 관장의 생각이다.

“딱지는 바로 어린 시절 나의 자화상입니다. 옛 딱지를 보면서 내가 어떻게 생각했고, 놀고, 자랐는지를 기억할 수 있어요. 보고 있기만 해도 그냥 즐겁고 흐뭇해요.”

지난 해 2월 25일 산골 폐교에 문을 연 추억의 박물관은 교실 2개 규모의 작은 박물관이다. 하지만 내공은 겉보기와 다르다. 진귀한 근현대사 자료 수만 점을 보유하고 있고 개관 1년 만에 알음알음으로 무려 3만 7,000여 명이 다녀 갔다.

지난 해 문화관광부 복권기금지원사업평가 전국 1위, 포털사이트 엠파스에서 선정한 ‘가보고 싶은 박물관’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글ㆍ사진=최규성 편집위원 kschoi@hk.co.kr

■ 이런 딱지 놀이, 기억하세요?

딱지 놀이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딱지 치기와 딱지 먹기이다.

딱지 치기는 종이로 손으로 접어 만든 소위 ‘개딱지’로 하는 것. 딱지를 내리쳐 바닥에 놓인 딱지를 뒤집으며 그 딱지를 따는 방식이다. 이기면 계속 공격할 기회가 주어지고 상대 딱지가 뒤집히지 않으면 치는 순서가 바뀐다.

개딱지의 재료로는 두툼하고 묵직한 골판지 박스가 으뜸이고 종합선물세트 등의 두꺼운 케이스도 사랑을 받는다. 공략법이 다양하다. 두꺼운 재질의 딱지는 무거웠지만 탄성이 크다는 약점이 있다.

두꺼운 딱지로 가운데를 정확히 내리치면 제풀에 솟아올랐다가 뒤집히는데 이를 ‘뱃통치기’라고 한다. 가볍고 얇은 딱지는 뱃통치기로는 공략 불가능. 이럴 때는 ‘바람치기’가 유용하다. 딱지 옆의 맨 땅을 쳐서 바람을 일으켜 뒤집는다. 바람의 의한 단순 수평이동을 방지하기 위해 발로 턱을 만드는 것이 필수.

승부욕은 갖가지 묘안을 동원시킨다. 탄성을 줄이고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무거운 물건을 딱지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전투 상황에서 다급하면 발로 꾹꾹 밟기도 했다.

촛농을 바르는가 하면 스태플러로 모서리를 촘촘하게 박은 ‘비기’도 등장한다. 딱지치기는 열기가 오르면 놀이보다는 운동이나 노동이었다. 아이들의 어깨를 단단하게 하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

딱지 먹기는 문방구에서 구입한 그림 딱지로 하는 놀이이다. 딱지에 그려진 계급과 숫자로 우열을 가리는 일종의 카드 놀이이다. 초보적인 놀이법은 한 움큼의 딱지를 가지런히 해 한 손에 쥐고 위에서부터 한 장씩 뒤집는 것이다. 높은 딱지의 소유자가 상대 딱지를 딴다.

일명 ‘까기’라고 했던 이 놀이법은 2명을 넘어서면 헷갈리고 유통양의 한계가 있어 시시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가기.’ 호스트(오야, 선 등 여러 표현이 있었다)가 자기를 포함한 사람 수만큼 그림이 보이지 않게 딱지를 놓으면 상대들이 하나를 선택한다(간다).

호스트의 딱지보다 높으면 ‘간’ 만큼 받고, 낮으면 ‘간’ 것을 잃는다. ‘까기’가 한 번에 한 장씩이었던 반면 ‘가기’는 무한대로 오가는 것이 가능했다.

많이 갔는데 호스트를 이겼을 경우에는 일일이 세어서 받았다. 시간이 많이 걸리자 ‘재기’라는 방법이 등장했다. 딱지를 쌓아 키를 재는 방법이다. 낡은 딱지를 가진 아이가 유리했다. 아예 50장, 100장 단위로 고무줄로 묶기도 했다. 100장 이상은 너무 길어 김밤 터지듯이 헝클어져 사용하지 않았다.

‘딱지 놓고 딱지 먹는’ 딱지판에서 자본의 집중은 필연. 한 번 가는 액수(?)가 내복상자, 라면박스 등으로 커졌다. 동네에서 이런 큰 판이 벌어지면 동네 아이들 전원이 관중이 됐다.

그리고 그날 밤은 동네가 시끄러웠다. 몽땅 털린 아이는 이웃 딱지부자를 찾아 다니며 높은 이자로 딱지를 빌려와 승자의 대문을 발로 차며 밤새도록 재도전을 청했다.

동네 딱지왕은 넓은 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딱지를 많이 따 기분이 좋을 때 잃거나 없는 아이들을 위한 딱지뿌리기 특별이벤트를 벌였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임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 꼬맹이들이 모두 몰려들었다.

최규성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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