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권력화와 세습화, 과연 대안은 없나?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아이들의 영어실력을 결정짓고, 영어실력의 격차가 다시 빈부격차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가 최근 우리 사회에 깊은 골을 파고 있다. 지금까지 ‘영어 공용화’나 ‘조기 영어교육’을 둘러싼 논란 등 영어권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모색이 있었지만, 아직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도 지난해 ‘영어교육 활성화 5개년 종합대책’을 수립하는 등 대안 마련에 나섰지만 여전히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대안을 찾기 위한 갑론을박
그간 대안의 양극단에는 ‘영어 공용화론’과 ‘영어 무용론’이 자리하고 있다. 공용화 주장은 소설가 복거일씨 등이 꾸준히 제기해왔다.
복씨는 자신의 저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우리 시민들은 영어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환경에서 영어를 쉽고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면서 “교육기회의 불평등도 줄어들어 기회의 평등에도 이바지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영어에 대한 맹신은 착시 현상일 뿐이며 일부 필요한 사람만 익히면 된다는 주장이 영어 무용론의 핵심이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이종구 교수는 “모든 국민이 ‘영어라도 잘하면 어떤 좋은 일이 생기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만든 것이 큰 문제”라며 “현재 한국의 과잉 영어교육은 사치와 낭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양극단의 주장은 각각 “더 큰 비용을 치를 수도 있다” “현실에 대한 무시일 뿐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영어권력이 초래하는 갈등과 분열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결국 ‘공교육 강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경인교대 영어과 이재희 교수는 “영어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에서 학교교육만 받고선 영어실력을 갖추는 게 거의 불가능하고 순전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현실이 영어 권력화를 낳고 있다”고 진단했다.
부실한 공교육, 대책은 없나?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I영어학원. 초등학교 3학년 정연이가 옆 친구와 한창 회화 연습 중이다. 교재에는 ‘leash(가죽끈)’ ‘puddle(웅덩이)’ 등 고교생들도 제대로 알까 싶은 단어들이 가득하다. “미국 교과서를 가지고 배우니 아는 단어가 많이 늘었다”고 했다. 학교에선 뭘 배우냐고 묻자 고개를 갸우뚱댔다. “일주일에 (수업을) 2번 밖에 하지 않고 여기랑 수준 차가 너무 나요.”
교실 영어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불만은 교사 자질, 부족한 수업시간, 아직 미미한 수준의 원어민 교사 확보율 등으로 요약된다.
우선 교사들의 역량 강화가 절실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려면 교사와 학생 간에 활발한 참여와 대화가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많은 교사들은 입을 닫고 있다.
지난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중3 영어수업 실태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교사 혼자 교과서 읽고 설명하는 식’의 수업이 절반(49.7%)이나 됐다. 대전 D고 2학년 김 모군은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기는커녕 영어 지문 소리 내서 읽기 조차 하지 않는 선생님들에게 뭘 바라겠느냐”고 말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이에 따라 지난해 ‘2006년 44개 국립 초ㆍ중등학교를 시작으로 2010년엔 모든 공ㆍ사립 중학교에 원어민 영어 보조교사를 적어도 1명씩 배치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계명대 영문과 김신혜 교수는 “원어민 교사 배치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오히려 한국인 교사 재교육에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청주교대 영어교육과 민덕기 교수도 “교대 재학 때 영어사용 인증제를 통해 초등 교사들의 기초 소양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족한 수업시간 수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외국어 학습에 가장 효과적인 초등학생 시기에 수업시간을 집중적으로 늘려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재 초등학교 3, 4학년이 받는 영어 수업은 주 1회(40분)에 불과하다. 오히려 1997에년 처음 영어 수업이 도입됐을 때보다도 1회가 줄었다. 고3까지 10년 동안 받는 영어 수업도 800여 시간에 불과해 통상 외국어 중급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받아야 하는 2,400~2,800시간엔 크게 못 미친다.
대입수능시험의 평가방식을 바꿔 공교육을 강화하자는 주장도 있다. 서울대 영어교육과 권오량 교수는 “공교육의 질을 근본적으로 향상하려면 현재의 듣기 읽기 위주의 수능 시험에 말하기 쓰기 시험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공교육 강화라는 대책 역시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경희대 영어학부 한학성 교수는 “우리 사회가 영어를 피할 수 없다면 이제는 보다 현실적인 영어 공교육 강화책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전문가 제언 "초등생때 영어 집중교육 필요한 사람만 더 배우게"
“요즘 우리 사회의 영어열풍을 보노라면 온 국민이 CNN을 자유롭게 청취하고 타임지를 술술 읽을 정도는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요. 자신에게 필요한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지,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게 학습목표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채서영(41ㆍ사회언어학) 서강대 영문과 교수는 영어가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듯, 유독 영어만 강조되는 지금의 풍조가 안타깝다고 말한다.
“드라마를 보면 누구나 알아듣는다는 듯이 영어가 대화에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광고에선 ‘맛있는 오렌지 주스’를 영어로 표현할 줄 모르는 엄마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등장합니다. 영어를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들조차 영어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회라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어를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부터 분명히 하고 효율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영어는 외국어이며 세상과 접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일반 국민은 대개 외국인과 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생활영어를 익히면 충분합니다. 직업상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까지 굳이 고급영어를 배우느라 경제적, 시간적 낭비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영어 습득에만 급급한 부모들의 태도도 문제다. 자녀를 영어권 국가에 조기 유학 보낸 부모들은 흔히 한국인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교육한다. 완벽한 영어를 배우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 교수는 이렇게 자란 학생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부모를 원망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했다. “한국인이면서 영어를 잘해야 경쟁력이 있는 것이지,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니면서 영어만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세계화 시대에 낙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국어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회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활력을 잃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어를 가르칠 것인가. 영어를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시기는 사춘기 이전이다. 이 시기를 지나면 아무리 많은 비용을 투자해도 기대만큼의 효과를 보기 어렵다.
때문에 언어습득의 최적기인 초등학생 시기에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집중적인 영어교육을 시키고, 그 이후엔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영어를 배우게 하자는 것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영어의 비중이 커지는 지금의 비효율적인 구조를 뒤집는 셈이다.
“지금은 영어교육의 효과가 떨어지는 시기에 오히려 영어 비중이 커지다 보니, 평생 영어 잘해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에 초점을 맞춰 질 좋은 교사와 예산을 집중 투입하되, 중ㆍ고교 과정에선 점차 영어를 선택과목으로 바꾸고 대학입시와 입사시험에서 영어의 비중을 대폭 낮춰야 합니다.
우리 말과 영어는 물론, 우리나라에서 가르치는 모든 외국어를 문화적 자산으로 간주하고 통합적으로 관리 및 교육하기 위한 ‘총제적인 언어정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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