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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뷰] 4선 연임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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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뷰] 4선 연임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

입력
2006.03.0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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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 연임에 햇수로만 만 12년. 이제 좀 느슨해질 법도 한데 그의 스케줄은 여전히 분 단위로 쪼개져 있다. 그래서 시대를 앞서 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숙명여대 이경숙(62) 총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숙명여대의 새로운 100년을 향해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이 총장을 총장실에서 만났다. 숙명의 미래를 말할 때 이 총장의 얼굴은 소녀처럼 밝게 빛났다.

_올해로 개교 100주년 입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숙명의 비전을 들려주십시오.

”지난 한 세기 동안 숙명은 민족 여성사학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습니다. 이제는 10여년 전 ‘제2창학’ 선언 이후 꾸준히 일구어온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리더십 대학으로 발돋움하고자 합니다. 숙명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헌신하겠습니다.”

_‘울어라 암탉아’라는 광고 카피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성의 리더십을 유난히 강조해 왔는데, 이 총장이 말하는‘여성 리더십’은 어떤 모습입니까.

” 부드러운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감성이 강조되는 문화의 시대, 정에 목마른 디지털 시대에는 여성의 섬세함과 유연함이 힘을 발휘합니다. 숙명이 키워내고자 하는 인재가 바로 이런 장점이 담긴 ‘섬기는 리더십’을 갖춘 여성 지도자 입니다. 입학과 동시에 모든 학생들에게 의사소통 능력, 국제화 능력, 봉사하는 성품 등 리더십의 기초 역량을 닦도록 하는 것도 이 목표 때문입니다.”

_CEO 총장이 시대의 흐름 같습니다. 돈을 많이 끌어와야 유능한 총장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학계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는데요.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개인이건 대학이건 비전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재정적 뒷받침이 없으면 비전도 한낱 꿈에 불과하게 됩니다.”

_1994년 총장으로 취임한 뒤 100주년을 맞는 2006년까지 1,000억원을 모금하겠다고 학교 안팎에 약속했습니다. 당시에는 그 말을 믿은 사람이 거의 없지 않았습니까.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학자라서 현실 감각이 없다, 그 많은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느냐 등등의 말을 무수히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명문 여대가 되기 위한 교육 인프라를 구축하려면 건물이 최소한 11개 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1,000억원은 필요했지요. 동문들에게 호소하고,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등록금 한 번 더 내기 운동’을 시작했는데, 동문들의 모교 사랑이 너무나 뜨거웠습니다. 외환위기 때 한 동문이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손에 100만원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서 빚잔치를 할 판이라고 했습니다. 학교에 매달 5만원씩 부치는 재미로 살았는데, 빚을 갚고 나면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100만원을 한꺼번에 들고 왔다고 했습니다. 차마 못 받겠다고 하니 안 받으면 삶의 의미를 잃는다고 하더군요. 같이 울었습니다. 70대 동문 두 분은 거금 3,000만원을 내놓았습니다. 동창 10명이 유럽여행 하려고 10년 동안 모은 돈이라고 했습니다. 이 나이에 유럽 가봤자 다리만 아프니, 학교에 돈이나 내자고 의기투합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이 담긴 기금이 발전기금입니다. 지금까지 927억원을 모았습니다. 올해 말까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_이번으로 네 번이나 총장으로 뽑혔습니다. 권불십년이라는 말도 있는데, 혹 학내 반발은 없었습니까.

”네 번이나 밀어준 교수님들이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든 셈 입니다. 이번에도 저를 포함한 2명의 후보가 투표 결과에 따라 이사회에 복수추천 됐는데 화합 차원에서 같이 올라간 후보가 사퇴했습니다. 교직원과 재학생, 동문 모두가 저를 믿은 만큼 그들의 신뢰가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명문 여대를 놓고 고려청자(이화여대)와 이조백자(숙명여대)로 비유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숙대’하면 떠오르는 소박하다는 느낌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역동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로도 들립니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그런 시선들은 숙명의 전통과 역사 속에 스며든 겸손함 때문이지요. 다른 대학이 갖지 못한 미덕입니다. 그러나 비전이 없는 소박함과 겸손함은 ‘정체와 위축’이란 부정적 의미로 바뀔 수 있습니다. 대신 미래의 목표가 뚜렷하면 언젠가 빛을 발하게 됩니다. 총장 재임 기간 동안 가장 역점을 둔 부분도 뚜렷한 비전을 세우는 것이었지요. 많은 분들이 우리 학생들을 ‘땅콩’ 같다고 합니다. 땅콩은 껍질은 얇지만 속은 알찹니다. 취업률 80%는 그냥 이뤄진 게 아닙니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대담 최성욱 차장 대우

■ 숙대와 이경숙 총장, 이것이 궁금하다

◆ 교문에 새겨진 성경 구절, 숙대가 기독교계 학교라고?

교문이 너무 볼품없어 학생들이 ‘교도소문’같다고 했다. 94년 ‘제2창학’을 선언하자마자 교문을 새로 짓기로 했다. 세 곳에 문을 만들어야 했는데 1개당 1억원씩은 필요했다. 학교에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기부자 10명에게 3,000만원씩 모금하고, 교문에 이름을 새기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런데 어느 기업인 한 분이 전부를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대신 자기 이름 말고 성경 구절을 새겨 달라고 했다. 기독교계 학교가 아니었기에 논란이 많았다.

2주 동안 교수, 학생, 동문의 중지를 모았다. 그리고 결단했다. 그건 숙대 변화의 첫걸음이었다. ‘소박하더라도 우리끼리 행복했던’ 숙대가 ‘자신감을 갖고 바깥과 교류하는’숙대로 바뀌기로 한 것이다. 물론 교문에 새겨진 성경 구절은 ‘강하고 담대하라’ 등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 숙대가 우산공장을 가지고 있다?

’제2창학’을 널리 알려야 했다. 홍보는 해야겠는데 돈이 없었다. 머리를 짜냈다. 눈ㆍ비 올 때 숙대 이니셜이 새겨진 우산을 여러 사람이 쓰고 다니면 그만한 홍보가 또 어디 있겠나 싶었다. 대량으로 주문하니 돈도 그리 많이 들지 않았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홍보용 기념품으로 숙대 우산을 한 10만개를 뿌린 것 같다. 각계 인사들이 나를 포함해 학교 관계자들을 만나면 우리 학교 우산 얘기를 꺼낸다.

◆ 숙대생들은 졸업하면 그만이다?

예전에는 사회 활동을 하는 졸업생 보다 주부들이 더 많았던 게 사실이다. 당연히 학교와 관계되는 일을 하는 사람도, 학교를 생각하는 기회도 타 학교 졸업생들 보다 적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제2창학’을 하면서 ‘등록금 한 번 더 내기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졸업생이 4만3,000명 정도 됐다. 지금까지 1만명이 넘는 동문들이 참여했다. 두 세 번 낸 동문도 많다.

그 어렵다던 외환 위기 때도 숙대는 건물 건립 공사를 중단하지 않았다. 다 학교를 사랑하는 졸업생 개미군단의 덕이다. 동문들은 5만원씩 30개월을 약정한다. 주부들이 대부분이니까 꾸준히 들어온다. 그런 작은 정성이 쌓여 변화를 일궈낸 것이다.

◆ 이 총장이 국회의원이었다고? 그것도 80년대 초에.

76년 미국에서 귀국했다. 국내 여자 정치학 박사 3호였다. 당시 정권이 숙대와 이대 출신의 정치학 박사를 (구색을 갖추기 위해) 여성계의 비례대표로 찍었다. 한참을 안 한다고 버텼다. 하지만 끝내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 과정에 여러 이야기거리가 있지만 지금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 경력 때문에 오해 받은 적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솔직히 지나고 보니까 얻은 것이 훨씬 많다. 국회 외무위원으로 활동하며 유엔 등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것이 지금도 도움이 된다. 또 국가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한 것도 총장 역할을 수행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당시 쌓은 인맥이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와주고 있다. 공원용지로 묶여있던 학교 부지를 푸는 데도 큰 덕을 봤다.

◆ 서울 법대를 마다하고 청파동으로 간 까닭은?

경기여고 졸업반 때인 61년 숙대가 전국 고교생 학력 경시대회를 열었다. 거기서 1등을 했다. 학부 및 대학원 전액 장학금에다 유학 지원, 교수 임용 보장 등의 파격 조건이 뒤따랐다. 당시 교수가 무척 되고 싶었는데, 내 소원을 알았던 담임 선생님이 “서울 법대도 좋지만 교수를 하려한다면 이 곳이 낫겠다”고 조언했다.

말하자면 숙대와 내가 서로에게 끌린 것이다. 너무 귀한 인연이라 생각한다. 숙대가 나를 이 만큼 키웠다. 나는 빚을 지고 있다.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총장일을 하고 있다. 나 이상의 후배를 길러내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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