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국 중국 등 세계의 모든 나라가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을 전체 국민의 꽃으로 만들었으나 무궁화만 유일하게도 황실의 이화(李花)가 아닌 백성의 꽃인데도 국화가 됐다.’
한국에서 20년 간 살다 간 영국인으로 우리 말과 우리 전통 연구에 적잖은 업적을 남긴 성공회 신부 리처드 러트는 ‘풍류한국’이라는 글에서 ‘무궁화는 평민의 꽃이며 민주 전통의 부분’이라고 썼다.
무궁화가 나라꽃이 된 것은 이 꽃의 속성이 우리의 민족 정신과 닮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대구교대 김규선 교수는 ‘무궁화 교본’에서 무궁화는 다년생 목본이기 때문에 순간의 아름다움을 택하지 않고, 장대하고 오랜 누림을 값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민족 정신과 상통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밝고 맑음 그리고 그것의 근원인 하늘과 태양을 숭앙하는 겨레라고 지적하고, 무궁화의 종류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너른 흰 꽃 바탕에 짙붉은 화심(花心)을 가진 꽃을 특히 사랑한 것은 이 꽃이 백의를 숭상하는 우리 민족의 기호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김 교수는 무궁화가 대개 7월부터 찬바람이 부는 10월 하순까지 계속 필만큼 화기(花期)가 긴 것도 누대로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력을 자랑해온 우리 민족의 염원에 안성맞춤이라고 평가한다. 토질을 떠나 어디다 옮겨 심어도 잘 자라는 특성 역시 이른바 은근과 끈기라는 우리 민족성에 맥이 닿아 있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1896년 독립협회가 독립문 주춧돌을 놓으면서 부른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가사를 담을 만큼 국화로 지정되기 전 일찌감치부터 은연중 무궁화를 우리 나라의 대표 꽃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름난 역사가, 문필가들이 무궁화와 우리 민족이 가까운 이유를 밝힌 글도 적지 않다. 조지훈은 ‘무궁화…희디 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연히 붉게 물들어, 마침내 그 한복판에서 자줏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이 나라 사람이 그리워하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수필가 이양하는 ‘무궁화는 흰 무궁화라야 한다. 우리의 선인(先人)이 취한 것도 흰 무궁화임에 틀림이 없다.…흰빛은 우리가 항상 몸에 감는 빛이요, 화심의 빨강은 또 우리의 선인들이 즐겨 쓰던 단청(丹靑)의 빨강이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시사월간지 ‘별건곤’에는 ‘조선 산(産)의 화초와 동물’이라는 글이 실렸다. ‘조선 민족을 대표하는 무궁화로 말하면 꽃으로는 개화기가 무궁하다 아니할 수 없을 만치 참으로 장구하며 그 꽃의 형상의 엄연하고 미려하고 정조 있고 결백함은 실로 조선 민족성을 그리어 내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각자 민족을 대표하는 꽃이 있지만 우리를 대표하는 무궁화 같이 모양으로나 질로나 적합한 것은 볼 수 없다.’
최남선도 조선의 이름 지리 물산 풍속 등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조선상식문답’(1946년)에서 ‘미상불 조선에는 어디를 가든지 무궁화가 흔히 있으니까 무궁화 나라라고 함이 까닭 없달 수 없으며, 또 무궁화는 꽃으로 가장 좋은 것이 아닐지는 모르지마는, 그 발그레한 고운 빛이 미인의 얼굴을 형용하는 데 쓰이는 터이며, 또 날마다 새 꽃이 피어가면서 봄 여름 가을을 지내는 긴 동안에 줄기차고 씩씩하게 피기를 말지 아니하는 점이 왕성한 생력을 나타내는 듯하여서, 나라를 대표하는 꽃을 삼기에 부족할 것이 없다 할 만합니다’고 썼다.
▲ 무궁화 노래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
(후렴)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동산
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백화가 만발한 무궁화동산에
미묘히 노래하는 동무야
백천만 화초가 웃는 것같이
즐거워하라 우리 이천만
▲ 무궁화 예찬시
금수강산 삼천리에 각색초목 번성하다
춘하추동 우로상설(雨露霜雪) 성장성숙(成熟) 차례로다
초목 중에 각기 자랑 여러 말로 지껄인다
복사 오얏 번화해도 편시춘(片時春)이 네 아닌가
더군다나 벗지 꽂은 산과 들에 번화해도
열흘 안에 다 지고서 열매조차 희소하다
울밑 황국 자랑소리 서리 속에 꽃핀다고
그러하나 열매있나 뿌리로만 싹이 난다
특별하다 무궁화는 자랑할 말 하도 많다
여름 가을 지나도록 무궁 무진 꽃이 핀다
그 씨 번식하는 것 씨 심어서 될 뿐더러
접 부쳐도 살 수 있고 꺾꽂이도 성하도다
오늘 한국 삼천리에 이 꽃 희소 탄식말세
영원 번창 우리 꽃은 삼천리에 무궁화라
▲ 왜 남궁억 선생의 詩인가
일제시대 무궁화 보급운동 펼친 선각자
한서 남궁억(1863~1939)은 나라 꽃 무궁화의 정신을 겨레의 가슴에 심은 선각자였다. 그는 진보적인 교육ㆍ저술가였고 정치가였으며 언론인이었고 문화인이었다.
그리고 무궁화 애호가였다. 배화학교에서 여성 교육을 펼치던 시절 가정시간에 무궁화꽃으로 한반도 지도와 태극기를 수놓게 해서 선물로 주고받도록 한 이른 바 '수본(手本)운동'을 펼쳤고, 강원 홍천군 서면의 모국(보리울)으로 낙향한 뒤 본격적인 무궁화 보급운동을 펼쳤다.
자신의 밭 수천 평에 무궁화 묘목을 심어 해마다 전국 학교와 교회 기독교단체와 가정에 분배했다. 무궁화를 곁에 두고 그 강인한 생명력을 통해 겨레의 얼을 지키고, 질긴 역사의 믿음과 전망을 확산하려 함이었다.
무궁화 시는 그 과정에 탄생했다. 4ㆍ4조, 7ㆍ5조의 운율로 당시의 입말에 맞춰 쓴 시는 쉬운 곡에 얹혀 겨레의 노래가 됐고, 무궁화 묘목과 함께 삼천리에 번져갔다. 그의 시는 그 열정의 소산이었고, 무궁히 식지 않을 겨레 얼의 꽃불로 지금도 남아 있다.
▲ 추인엽 화백은
서양화가 추인엽(44)씨는 동양적 자연관을 토대로 인간과 자연의 소통에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다. 지금까지 모두 6차례 개인전을 열어 유화부터 목탄, 설치미술, 디지털 작품까지 다채로운 창작 세계와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예원학교 미술과 강사로 재직중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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