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최근 “이라크 주둔 호주군은 일본 자위대가 이라크에서 철군하더라도 계속 남아 업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라크 남부 사마와에 주둔한 일본 자위대가 5월 철수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자위대 경호를 맡았던 호주군도 철군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는 발언이었다.
호주 언론은 이라크에 파병한 대다수 나라들이 철군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현실에서 하워드 총리의 결정을 의외로 받아들였다.
하워드 총리 취임 10주년 맞아 호주 언론이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라크 주둔 호주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절반을 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호주의 정치 분석가들은 “충분히 예상했던 발언”이라며 덤덤해 했다.
호주국방대 제임스 코튼(정치학) 교수는 “하워드 총리가 이라크에 파병한 진짜 이유는 미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였다”며 “그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라크에 호주군을 계속 주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추가로 병력을 보내달라는 미국 요청을 받고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이 망설이는 반면 하워드 총리가 호주군 110명을 더 보내겠다고 한 것도 “미국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라고 그는 덧붙였다.
호주와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돈독한 관계이다. 미국이 펼치는 대 테러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나라도 바로 호주이다.
하워드 정부는 국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2004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일부에서는 중국이 미국을 제외한 채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주도권을 쥐려 하자 미국의 ‘대변인’으로 호주를 끌여들였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전문가들은 “이 모든 것이 하워드 총리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코드’를 확실히 맞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은 보수 우익의 가치를 지향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하지만 정작 이들을 이어준 결정적 계기는 2001년 9ㆍ11 테러였다.
하워드 총리는 그 해 9월10일 호주_뉴질랜드-미국 삼각동맹(ANZUS) 창설 50주년을 맞아 취임 첫 미국 방문길에 나섰는데 뉴욕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뉴욕 맨해튼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건물(펜타곤)이 공격을 당했다.
시드니연구소 제럴드 앤더슨 소장은 “미국의 심장부가 테러 당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 본 하워드 총리는 부시 대통령의 대 테러전쟁에 적극 동참하기로 마음 먹었고 실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가장 먼저 파병했다”며 “언론이 하워드 총리를 미국의 부보안관(deputy sheriff)이라고 빗댈 정도였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과 친밀해 지려는 하워드 총리의 노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4년 재선에 도전하는 부시 대통령이 민주당 존 케리 후보와 박빙 승부를 벌이는 와중에 하워드 총리는 “부시가 잘 하길 바라며 재선에 성공하길 빈다”며 노골적으로 부시 지지를 선언했다.
누구도 선거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의 행동은 무모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케리 후보 측은 “실망스럽다”며 공개 경고했다.
호주 언론은 “캐리가 당선되면 하워드 총리와 거리를 둘 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하워드 총리는 부시가 승리해야 자신의 입지도 탄탄해질 것으로 믿고 승부수를 던졌다. 부시 대통령은 승리했고 하워드 총리는 부시 대통령과 축하를 나누며 우정을 과시했다.
호주 여론은 하워드 총리가 미국에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지난해 로이 연구소가 18세 이상 호주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68%가 “호주가 지나치게 미국 입장만 대변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호주국립대 스튜어트 해리슨(국제관계학) 교수는 또 호주_미국 FTA를 언급하며 “하워드 정부는 미국 시장의 새로운 문이 열렸다고 평가했지만 사실상 호주가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며 불평등한 협정이라고 비판했다.
올해 초 호주 언론은 미국이 1년 넘게 호주에 대사를 파견하지 않고 있으며 호주를 방문하기로 한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두 차례나 방문을 취소한 사실을 언급하며 “총리가 너무 미국 눈치를 봐서 미국이 호주를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하워드 총리는 온갖 비난도 불구하고 꿋꿋하다. 로이 연구소의 앨런 긴저 소장은 “하워드 총리는 미국과 확실히 손 잡으면 잃는 것보다 얻은 게 더 많다고 확신하고 있다”며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미국의 정보력에 기대 호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호주 외교통상부 고위 관계자는 “호주 스스로 많은 비용을 들여 무기를 사고 정보 체계를 갖추는 것보다 슈퍼 파워 미국이 갖고 있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9ㆍ11 테러 이후 전세계가 이슬람 급진 무장세력을 두려워 하고 있다”며 “특히 전세계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를 코 앞에 둔 호주로서는 이들에 대한 정보가 더욱 절실해졌다”고 분석했다.
흥미로운 점은 호주 국민들의 미국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다. 지난해 로이 연구소가 실시한 호주 국민의 지역ㆍ국가별 호감도 조사에서 미국을 좋게 생각한다는 응답자는 58%에 그쳤다.
미국보다 낮은 호감도를 보인 곳이 이란, 이라크 등 중동 지역임을 감안하면 대상 국가 중 꼴찌나 다름없다. 게다가 국제정세에 가장 큰 위협을 묻는 질문에 “미국의 대외 정책(58%)”이라는 응답자가 “이슬람 급진 무장단체(58%)”라는 응답자와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미국과의 동맹이 호주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절대 다수인 72%가 그렇다고 답했다.
긴저 소장은 “미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부시 대통령에 대한 반감일 뿐이며 전략적으로 볼 때 대다수 호주 국민은 미국과 손잡는 것을 당연시한다”며 “하워드 총리의 자유당연합 뿐만 아니라 노동당이 정권을 잡아도 이 기조는 변함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호주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질문은 처음부터 문항에 없는 셈이었다. 앤더슨 소장은 “호주처럼 지리적으로 동떨어져 있고 ‘작은’나라는 큰 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그 큰 나라는 바로 미국”이라고 못박았다.
케리 네틀(녹색당) 상원의원은 그러나 2002년 호주인 88명의 목숨을 앗아간 발리 폭탄 테러를 언급하며“미국과 손 잡는 데만 신경 쓰는 하워드 정부가 무슬림을 비난하며 불필요한 전쟁에 끼어 드는 바람에 호주 국민이 큰 희생을 당한 것”이라며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 뒤 그것을 없애기 위해 미국과 손 잡아야 한다는 주장은 모순”이라고 비난했다.
캔버라ㆍ시드니=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