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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헤집어진 상처, 삶은 버티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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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헤집어진 상처, 삶은 버티어진다

입력
2006.02.27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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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영씨의 소설집 ‘그녀의 나무 핑궈리’(민음사)는 다음날 늦잠을 자도 좋은 느긋한 때를 잡아 펼쳐야 하는 책이다. 도중에 접고 잠을 청하자면 상당한 자제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만한 흡입력과 점착성을, 장편소설도 아닌 단편집에서 경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에 든 8편의 작품들은 대체로 고전적인 소설 문법, 그 단정한 규칙에 충실하다. 형식, 내용, 문법의 파괴라는 근년의 소설 흐름과 거리를 두고 이루어지는 문체와 서사와 구성의 정공법이, 역설적으로, 낯선 미감을 자극한다.

읽어 삼키기 편하도록 잘게 다듬어놓은 단문의 속도감, 심심하지 않을 만큼의 간격으로 배열된 시적인 표현들, 작품들 간의 미묘하고 또 때로는 파격적인 문체의 변주, (독자의) 질문이 튀어나오는 지점과 (작가의) 해명이 제시되는 지점이 유지하는 미학적 거리, 즉 치밀한 구성력이 그렇다.

첫 작품 ‘나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엄마 머릿속에는 나비가 산다.…그 나비는 조금씩 자라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불안하다.” 머리 속에 ‘나비’(모종의 뇌 질환)를 키우는 엄마는 생계를 위해 식당에서 일을 하며 초등학생인 ‘나’와 당뇨를 앓는 친정 노모를 먹여 살리는 가장이다. 아빠는 엄마의 병 치료비를 벌기 위해 일하다 ‘나’가 태어나기도 전에 숨졌다.

가족의 가난과 구성원간의 소소한 갈등의 서사를 끌고 가는 화자인 ‘나’는 틈만 나면 꽃 그림을 그린다. 꽃으로 엄마의 나비를 유인해 불러내기 위해서다. ‘나’의 결핍은 가난도, 학교에서의 따돌림도 아닌 가족의 정, 엄마와의 교감이다. 머릿니를 잡아주는 엄마를 내 곁에 붙들어두기 위해 ‘나’는 이를 머리 깊이 감춘다. “알을 슬어라. 겨울이 되어도 죽지 않는 엄마의 하얀 나비처럼 영원히 죽지않을 알을 슬어라.”(33쪽)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결핍의 영혼들이 갈망을 지탱해가는 고통스러운 궤적의 기록이다. 사랑의 상실감, 소통에의 갈망과 어쩌지 못하는 격절감,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허망한 집착 등이다. 그리고 작품 속 인물들을 지탱하는 힘은 그들이 잃어버렸거나 가지지 못한 것들의 시원, 그 절정의 지점으로 회귀하려는 갈망이다.

‘구리연’의 남자는 전화 배선공이다. 그는 늘 맨홀 속에서 구리선을 잇고, 맨홀 바깥에 나와서는 자투리 구리선을 엮어 온갖 물건을 만들며 소일한다. 아내는 사고로 아이를 잃고 난 뒤 넋이 나간 채, 틈만 나면 카지노의 빛과 숫자 속을 방황한다. 어느 겨울, 그는 어렵사리 실종된 아내를 찾아 교살한 뒤, 아내와 인연을 맺었던 공사장의 맨홀 속으로 찾아 든다. 그는 구리연을 만들다 얼어 죽는다.

날지 못하는 연, 하지만 그 연은 공상 속에서 하늘을 난다. “허공의 바람이 내 몸을 경계로 나누어진다. 내 등 위로 차고 빠른 바람이 불어가고 배 아래로는 좀 수굿해진 바람이 흘러간다. 그 미세한 바람결의 속도 차이로 등황빛을 띤 나는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116쪽)

상실의 상처는, 어쩌면, 존재로 서기 위해 자궁의 끈을 놓아야 하는 모든 포유동물의 숙명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갈망은 잃어버린 자궁을 찾아 헤매는 존재들의 운명일 것이다. 사랑의 절정을 추억하게 하는 맨홀 속의 어둠을 찾는 ‘구리연’의 남자, 짝사랑하는 여자와의 ‘숙명적 몸의 거리’를 극복하고자 여자의 지문이 묻은 쇠붙이를 삼키는 ‘피뢰침’의 남자, 열대 고향의 청록 바다가 보고싶어 눈발을 헤치고 번지 점프대를 기어오르는 ‘번지 점프대에 오르다’의 이주노동자…, 우리의 모습들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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