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을 순방 중인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23일 예정에 없던 레바논을 깜짝 방문했다. 라이스 장관의 레바논 방문은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 암살 1주기(14일)를 맞아 친 시리아계 에밀 라후드 대통령에 대한 사임 요구가 거세진 상황에서 이뤄져 라후드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한 미국의 계산된 행보로 해석되고 있다.
21일부터 닷새 일정으로 진행된 라이스 장관의 중동 순방은 팔레스타인 의회를 장악한 무장단체 하마스를 압박하고 이란의 핵개발 저지를 위한 우방과의 공동전선 구축이 목적.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3국을 방문하는 것으로 돼 있다. 라이스 장관은 사우디 방문을 마친 뒤 마지막 순방지인 UAE의 수도 아부다비로 향하는 길에 기수를 레바논 베이루트로 돌렸다.
라이스 장관은 베이루트에 머문 4시간을 라후드 대통령의 숨통을 조는 스케줄로 채웠다. 개혁 성향의 푸아드 시니오라 총리와 13일 귀국한 하리리 총리의 아들 사드 등 반 시리아 인사들, 기독교 마론파 원로로 라후드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에 결정적 키를 쥔 나스랄라 스페이르 주교 등 종교지도자들을 만났다. 레바논은 기독교 마론파(대통령) 이슬람 수니파(총리) 시아파(의회 의장)가 권력을 분점하고 있다. 라이스의 면담 명단에서 라후드 대통령은 빠졌다.
라이스 장관은 7개월 전 방문 때 라후드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고 밝힌 뒤 대통령 퇴진 문제는 “레바논 국민에게 달렸다”며 표면상 중립적 입장을 강조했다. 그러나 “레바논 국민들은 과거보다 장래를 생각하고 레바논의 주권을 지키는 대통령을 필요로 한다”고 밝혀 라후드 대통령의 퇴진을 바라는 미국의 입장을 암시했다. 시니오라 총리와 회담에서는 “하리리 암살 사건에 대한 유엔 조사에 시리아가 전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리아의 반(半) 식민지였던 레바논은 독립노선을 추구한 하리리 총리 피살 이후 친 시리아파와 반 시리아파의 대립으로 정치적 긴장이 높다.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시리아 정부는 레바논 주둔군을 철수시켰고, 지난해 5월 자유총선에서 승리한 반 시리아파 연합은 라후드 대통령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 라후드 대통령은 2004년 시리아의 도움으로 헌법을 개정해 3년간 임기를 연장했으며 내년 말 임기가 만료된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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