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과학에 대한 전적인 신뢰, 특히 생물학을 근간으로 하는 지식의 대통합을 주장한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역저 ‘통섭’(Consilience)에 대한 비판이자 일종의 문명 비평이다. 저자 웬델 베리(72)는 환경이나 생태 문제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그리 낯설지 않을 인물이다.
미국 켄터키에서 태어난 베리는 작가이면서 농부다. 젊은 시절 켄터키대학과 스탠포드대학에서 영문학과 문예창작을 배운 뒤 뉴욕대학과 켄터키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러나 30대 초반에 대학을 사직하고 5대에 걸쳐 조상들이 농사를 지어온 고향마을 헨리 카운티로 돌아와 지금까지 40년 동안 줄곧 전통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독립적인 소농이 중심이 된 공동체를 기반으로 ‘인간이 땅에 뿌리를 박고 책임 있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천착하는 시, 소설, 에세이 등 40여 권의 책을 냈고, T. S. 엘리어트상을 비롯한 문학상, 저술상을 받았다고 한다.
베리가 왜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하버드대 석좌교수의 저서를 문제 삼은 것일까. 그것은 윌슨의 ‘통섭’이 ‘과학은 전적으로 선하며, 무한한 진보로 인도하고, 모든 답변을 가지고 있다(또는 가지게 될 것이다)는 대중적 믿음에 부합’해 쓴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베리가 이 글을 쓴 것은 윌슨의 책 한 권을 따지고 들겠다기보다는 대다수의 과학자와 대중이 갖고 있는 과학에 대한 믿음, 또는 그 믿음의 체계를 비판하려는 것이다.
윌슨이 ‘별들의 탄생에서 사회제도의 운용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물리적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는 물질적 진행과정에 근거한다’며 세계를 ‘합법칙적인 물질세계’로 규정하는 것에 베리는 반대한다. 베리는 인간과 인간의 영혼, 그리고 생명, 나아가 자연세계의 모든 것은 ‘불가해하고 형언할 수 없는’ 요소로 가득 차 있다고 믿는다. 삶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그가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의 목록 앞 자리에 꼽은 것은 피조물과 삶이다. 그것들은 ‘그림으로 그리거나 이야기하고, 노래하거나 춤출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술은 ‘개인과 개체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이며 ‘주제를 고양’하는 것이지 윌슨이 ‘통섭’에서 섣불리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베리는 ‘통섭’이 전제하는 물질주의와 환원주의, 기계론적 사고는 불가해한, 더욱이 기적적인 성격을 갖는 삶의 의미를 뺏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이러한 현대 과학의 사고방식은 외적 맥락이면서 이미 내면화한 산업주의와 전체주의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은 팔려갈 물건처럼 제 몸에 가격이 매겨지는 신세로 전락’했고, 예술과 인문학 역시 이러한 ‘정복주의적 경제체제와 공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윌슨이나 베리 모두 환경보호론자이지만 환경이나 생태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 윌슨이 원자나 분자, 유전자, 또는 은하수와 위성, 별들에 대해 아는 바로 그 체계를 더 확대하고 유기적으로 소통하기만 하면 스스로를 교정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 반면, 베리는 그 체계가 지금까지 배제해왔던 것들을 포함시키려는 노력을 할 때만 스스로를 교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떤 가치를 삶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일까. 베리는 우리가 ‘한탕주의 뜨네기들’로 ‘약탈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붙박이들’로 ‘정착하여 자신이 일군 삶과 살고 있는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의 환경과 역사를 알아야 하고, 개개인에 대한 존경심, 이웃간의 정, 충직함을 회복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가 하는 일의 궁극적인 기준이 전문가주의나 이윤추구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공동체의 건강과 지속성이었다고 가정’하는 것, 그것이 베리가 제시하는 삶의 새로운 기준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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