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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재청 없는 동의(動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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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재청 없는 동의(動議)

입력
2006.02.27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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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국내외 두 대학 총장의 거취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의 로렌스 서머스 총장은 며칠 전, 6월에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과학기술원(KAIST)의 러플린 총장은 2년의 계약기간 만료(7월)를 앞두고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취임 전부터 화제와 관심을 모은 두 사람은 교수들의 불신임투표, 연임반대운동 때문에 개혁의 포부를 펼치기 어렵게 됐다.

대학 개혁의 적임자로 꼽히던 두 스타는 왜 실패하게 된 것일까. 재무장관을 역임한 서머스는 미국에서도 알아 주는 천재집안 출신의 재사이며 러플린은 199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학자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함께 일해야 할 교수들의 인심을 얻지 못했다. 불신임투표나 반대운동이 그들의 연임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사회가 교수들의 지배적인 의사를 무시하기는 어렵다.

두 총장의 독단적 대학운영

서머스 총장은 2001년 취임 이후 돈이 안 되는 인문학보다 과학ㆍ공학에 치중하고 캠퍼스를 2배로 늘리거나 세계 곳곳에 분교를 설치키로 하는 등 효율성 위주의 개혁을 추진했으나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걸핏하면 행사에 지각하고 교수들에게 면박을 주어 스스로 인심을 잃었다. 또 “과학 수학 최우등생 중에 여자가 적은 것은 남녀의 선천적 차이 때문”이라거나 “1970년대 서울에는 100만 명 가까운 미성년 윤락녀가 있었다”고 말해 구설수에 오를 만큼 사려 깊지 못한 언동이 잇따랐다. 러플린의 경우에도 독자적인 의사결정과 일방통행식 리더십, 개인 일정을 이유로 중요한 학내 행사에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남을 무시하는 언행이 문제로 지적됐다.

이들의 좌절은 교수들 때문이며 결국 교수들이 문제라는 시각이 있다. 원래 교수집단은 이기적이고 개혁보다 현상유지를 바라는 철밥통이며, 총장에 대한 거부는 연구실적이 부족한 사람들의 보신을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수들이 아무리 이기적이더라도 명분이 옳고 명분의 현실화방안도 합리적이면 싫든 좋든 납득하고 따르게 마련이다. 지성과 양식을 갖추었다면 교수가 아니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들의 명분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민주적인 조직일수록 회의라는 형식을 통해 모든 것을 논의하고 결정한다. 회의는 다수의 횡포와 소수의 독재를 막으면서 구성원 의견의 공통분모를 합리적으로 찾아내는 수단인데, 그들은 회의보다 독자적 결정을 더 선호했다. 회의에서 의안으로 채택되려면 동의(動議)에 이어 재청(再請), 때로는 삼청이 필요하다. 며칠 전 무역협회는 이희범 전 산자부장관을 신임 회장으로 선임하는 데 성공했다. 그를 거부하는 측이 다른 후보를 추천했으나 추천에 대한 재청이 없어 의안으로 성립하지 못했고, 따라서 투표까지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서머스와 러플린은 민주적 회의절차를 준수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개혁동의안은 재청을 얻어내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25일로 3년을 맞은 참여정부는 국민의 재청을 받고 있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더 국가적 아젠더의 설정에 관심을 기울였고, 어느 대통령보다 더 아젠더 선점을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의장이면서도 누구보다 더 손을 많이 들어 긴급동의를 했다. 그의 등장과 기여에는 분명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으며 재임기간도 아직 2년이나 남았다. 그런데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노무현정부와 국민의 재청

재청은 곧 앙코르다. 앙코르에는 따뜻하거나 열렬한 박수가 따른다. 박수를 받으려면 공연을 잘 해야 한다. 그런데 “누가 그걸 모르나, 지금 당장 받는 박수보다 역사적 평가가 더 중요하다. 개혁을 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 눈 질끈 감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피도 눈물도 없이, 그리고 웃음도 없이 판을 뒤집어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한다면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필요하고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어떻게 해야 동의에 대해 재청을 받을 수 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재청 없는 동의는 독선이며 억지다.

임철순 주필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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