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에게 코치로 내려가라니…. 나를 두 번 죽이지 말아달라.”
흥국생명 황현주(40) 감독이 20일 ‘감독에서 물러나 수석코치를 맡으라’는 구단의 지시를 거부했다. 흥국생명은 지난 19일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황감독에게 ‘우승을 위해 김철용 감독을 데려왔으니 수석코치로 물러나라’고 통보했다.
국내 프로스포츠에서 시즌 도중 감독이 코치로 강등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 게다가 흥국생명은 현재 1위를 달리고 있어 이번 감독 교체의 파문은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정도 매끄럽지 못했다. 흥국생명의 오용일 단장은 이미 감독 교체를 통보한 뒤에도 파문을 의식한 나머지 “감독 경질은 절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드러날 거짓말을 한 것.
‘오리발’로 일관한 흥국생명은 이튿날인 20일 아침에 “황현주 감독이 수석코치로 팀에 잔류해 팀 우승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는 보도자료를 돌렸다.
그런 뒤에도 흥국생명의 거짓말은 계속 됐다. ‘1위팀 감독을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취재진들의 질문에 오용일 단장은 “시즌이 끝나면 김철용 감독을 놓칠까 두려워 감독 교체를 서둘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철용 감독은 “황 감독을 밀어내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시즌이 끝난 뒤 가겠다고 했지만 흥국생명의 재촉이 심했다”고 고충을 털어 놓았다. 흥국생명의 ‘욕심’이 황현주 감독은 물론 김철용 감독의 가슴에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셈이다.
배구계는 이번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졌다. 배구인들은 한목소리로 “1위팀 감독을 내쫓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황현주 감독에게 코치로 내려가라는 말은 그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며 혀를 찼다.
그러나 오 단장은 “우승 경험이 많은 김 감독 밑에 있으면 황 감독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뿐 당사자의 마음 고생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흥국생명의 경솔한 행동과 거짓말 릴레이는 당장 선수들의 사기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일부 선수들은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며 절망할 정도.
거짓말이 쌓이면 신뢰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시즌 도중 감독의 수석코치 강등은 흥국생명만이 아니라 한국배구사에 큰 오점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이상준 기자 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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