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글빙글, 번쩍번쩍, 휘황한 조명 아래 어른 몸뚱이만한 스피커가 쏟아내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흔드는 사람들. 몸짓과 표정이 무아지경 그 자체다. 나이트클럽의 한 장면이 아니다. 요즘 웬만한 헬스클럽에 가면,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하는 이런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춤 바람을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댄스 교실’이 넘쳐나고 있다. 1990년대 초 한 집 건너 하나씩 생겨난 노래방, 그 뒤를 이어 성업한 노래교실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전 국민의 가수화’ 현상을 부추겼다면, 댄스 교실 열풍은 대한민국 국민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춤꾼으로 만들 태세다.
16일 오후 7시30분,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백화점 문화센터 내 ‘효리섹시댄스&디바댄스’ 교실. 20여명의 수강생들은 이날 마지막 수업에서 지난 3개월 동안 땀 흘려 배운 가수 빈의 춤을 마무리했다. “다음에는 이효리의 태엽인형 춤을 배울 텐데 다들 나오실 거죠?” 수업을 마친 뒤 강사 손수경(28)씨가 묻자 수강생들은 “예~”라는 함성으로 화답한다. 한 직장 여성은 “나이트클럽에서 그때 그때 춤을 바꿔가며 섹시함을 뽐내는 방법도 알려달라”는 주문도 내놓는다.
그냥 춤이 좋아서 시작했다는 사람부터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날려보기 위해 참가한 꼬마 숙녀, ‘나잇살’을 떨치고 싶은 주부들에 이르기까지 춤을 배우는 사연도 가지가지다. 직장의 춘계 수련대회에 들고 나갈 춤을 배우러 왔다는 새내기 회사원 박윤진(26)씨에게 춤은 생존전략이나 다름없다. “지난 연말 직장 송년모임에서 선배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된통 창피를 당했어요. 노래는 너무 흔하고, 이제 춤을 잘 춰야 직장 생활도 수월한 시대가 된거죠.”
15일 직장인들 퇴근시간 무렵에 찾은 서울 남대문시장 근처 아자휘트니스센터 내 ‘에어로 댄스 무브’ 교실. 시내에 위치한 까닭에 여성들이 주류인 동네 댄스 교실과 달리 남성 회원들도 적잖이 눈에 띈다.
무기력증을 해소하기 위해 춤을 배운다는 취업준비생 이재인(27)씨는 “예전에는 친구들끼리 ‘말장난’을 치고 놀았다면, 요즘은 재미있는 몸짓을 주고받는 ‘몸장난’을 친다”면서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려면 웬만큼 춤을 출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피트니스센터에서 운영하는 댄스교실이라서 운동 효과를 노린 이들도 많다. 직장동료인 김동건(39) 이지홍(38)씨는 “혼자 하는 운동은 금방 지겨워지기 마련인데 춤은 함께 추니까 재미있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사 문성민(25)씨는 “운동으로서의 춤의 강도와 효과는 러닝머신의 두 배”라며 “덤으로 따라오는 재미도 수강생들에게는 큰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넷에도 춤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다. 시간을 내기 어렵고 경제적으로 혹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는 인터넷이 안성맞춤이다. 각종 포털에서 ‘댄스’를 검색어로 입력하면 수 백개에 달하는 카페와 동호회가 뜬다. 이들은 비, 유니, 채연, 이효리 등 인기 가수들의 동영상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놓고 회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온라인 댄스모임 회원인 김지현(26)씨는 “컴퓨터 앞에서 춤을 따라 추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 주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며 “클럽을 전세 내서 여는 정기모임, 수시로 열리는 ‘번개’에 자주 참석해 춤도 추고 회원간 친목도 다진다”고 말했다.
춤바람이 일면서 동네 중소 규모 헬스클럽 주인들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늘어가고 있다. 서울 불광동에서 헬스클럽을 운영하는 김금자(50)씨는 “댄스 교실을 운영하는 대형 피트니스센터로 옮겨가는 회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춘풍(春風)을 타고 ‘춤풍’은 더욱 거세게 불 조짐이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
■ 클럽, 비용 싸고 밤새 놀고… 춤꾼들의 '해방구'
“춤은 저만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몸짓일 뿐이에요. 선정적이라고 비난하는 어른들의 삐딱한 시선을 이해할 수 없어요.”
조모(23)씨는 한 밤 중에도 ‘필’(feel)이 꽂히면 서울 홍익대 앞 힙합 클럽을 찾는다. 밤새 놀 수 있는 클럽이 20여 곳이나 되고, 비용도 1만원이면 족하다. 그는 “티셔츠에 모자를 눌러쓰고 나와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이 춤을 추다 보면 스트레스가 사라진다”고 한다.
15일 밤 11시30분. ‘춤꾼들의 해방구’ 홍대 앞을 찾았다. S클럽의 지하 계단을 내려서자 드라이아이스의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사방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CF 배경음악으로 귀에 익은 시아라(Ciara)의 ‘Goodies’를 격정적으로 쏟아낸다.
이내 바닥에서 발끝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두드리며 온 몸으로 퍼지는 음악의 강렬한 느낌에 빠져들지만, 몸은 쉽게 말을 듣지 않는다. 구석에서 혼자 춤추던 정모(22ㆍ여)씨는 기자가 쭈뼛거리자 살짝 귀뜸한다. “억지로 의식하지 말고 리듬에 몸을 싣고 따라가 보세요. 그 느낌이 바로 자유예요.”
클럽의 인기는 어느 정도일까. S클럽 매니저 남모(30)씨는 “직접 관리하는 회원수만 1,000명을 넘는다”고 말한다. “주말이면 지방에서 관광버스를 빌려 단체로 오는 손님들도 많죠. 얼마 전 대구에서 놀러 왔다가 돈이 떨어져 발을 동동 구르는 여대생에게 차비를 쥐어준 적도 있어요.” ‘클러버’(클럽을 찾는 사람)가 되려면 춤도 배워야 한다. 수능시험을 친 뒤 24만원을 들여 두 달간 힙합댄스 학원에 다녔다는 예비 대학생 김모(20)씨는 “요즘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어지간한 춤은 마스터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자정을 훨씬 넘겨 Q클럽으로 자리를 옮겼다. 클럽이 가장 붐비는 시간이지만, 이벤트가 없는 평일이어서 복장은 그리 유난스럽지 않다. 레게 머리나 슬립에 짧은 치마를 입은 모습이 더러 눈에 띌 뿐 대부분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다. 최모(24)씨는 “클럽 하면 무조건 섹시코드만 떠올리는데, 클러버에게 겉모습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내친 김에 요즘 유행하는 ‘부비부비’에 대해 물었다. 2004년 모 케이블 방송을 통해 퍼진 이 춤은 남녀가 몸을 밀착해 추기 때문에 ‘매미춤’으로도 불린다. 최씨는 “춤을 추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끌리는 이성에게 접근하게 마련이다. 거절 당하면 무안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통하는 파트너와 함께 하기엔 최고의 춤”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오전 2시, N클럽. 몸을 움직이기 힘들 만큼 클러버들로 가득하다. 귓가를 때리는 음악보다 밀착한 몸에서 전해오는 땀 냄새가 더 자극적이다. 이곳에 발을 디딘 이상 혼자서만 춤을 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모(22)씨는 “남자들은 대개 ‘부비부비’를 위해 클럽에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10번 시도하면 6, 7번은 성공한다”고 털어놓는다.
오전 3시가 지나서야 클러버들이 하나, 둘씩 클럽을 빠져나간다. 아침까지 이어지는 주말의 열기에 비하면 그나마 이른 편이다. 홍대 앞 클럽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 "몸치 탈출? 음악듣고 박자감부터 키우세요"
1998년, 춤 좀 춘다는 대학생 한 명이 가슴을 치며 ‘결연한 사명’을 마음에 새겼다. 즐겁자고 놀러간 나이트클럽에서 ‘막춤’ 아니면 ‘면벽수행’으로 분위기를 흐리는 ‘몸치’들을 보면서 ‘저들을 구제해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발견한 것. 그는 곧장 나이트클럽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각종 춤을 집대성해 ‘나이트댄스’라는 신종 ‘잡탕춤’을 만들어냈고, 서울 강남에 학원까지 차렸다.
‘김영우나이트댄스’의 김영우(27ㆍ사진) 원장. 그가 창안한 나이트댄스는 이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엄연한 춤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문화센터는 물론 동네 헬스클럽에도 나이트댄스 강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나이트댄스란 디스코, 힙합, 탱고 등 장르를 불문하고 일반인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춤 동작들만 골라 재구성한 ‘모듬댄스’로, 나이트클럽 등에서 실전에 바로 활용할 수 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우리나라는 유흥문화가 상당히 발달했는데도 정작 춤 추러 갔을 때는 어떻게 해야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 잘 몰라요. 알려주는 사람도 전혀 없구요.” 김 원장은 ‘춤도 모르면 배워야 한다’는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경희대 국제경영학부를 졸업한 뒤 대학원에도 진학, 문화예술경영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박사 학위까지 받아 대학 정규 교육과정에 실용댄스학과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김영우나이트댄스의 주 고객은 20~40대 직장인과 어머니회 동창회 등 친목모임. 김 원장이 주로 가르치는 춤은 80년대 디스코를 현대적으로 바꾼 ‘복고댄스’, 여자들이 귀엽게 출 수 있는 춤만 모아놓은 ‘아쿠아댄스’, 약간 껄렁껄렁한 동작으로 남성적 터프함을 보여줄 수 있는 ‘건달댄스’, 채연 이효리 빈 등이 유연한 웨이브 동작으로 히트시킨 ‘섹시댄스’ 등이다.
김 원장은 형편상 댄스학원에 갈 수 없는 ‘몸치’들에게 일단 어떤 장르든 음악을 많이 듣고 박자감부터 키우라고 조언한다. 춤이란 음악에 맞춰 추는 건데, 아무리 가르쳐도 춤이 안 느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음악과 담 쌓고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단다.
“그 다음엔 춤을 접할 수 있는 영상물을 꾸준히 보세요. 보다 보면 동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저절로 그 동작의 기본을 따올 수 있죠. 그걸 응용해 한, 두 개라도 자기만의 개인기 동작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초보자일수록 여러가지 춤을 많이 배우려고 하는데, 금물이에요. 노래방 애창곡이 있듯이 자기만의 ‘애무’(愛舞) 댄스를 만들어 보세요. 춤추는 게 즐거워질 겁니다.”
박선영기자
■ 당신의 춤은 당신의 계급이다
“춤을 추고 싶을 때는 춤을 춰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춰요~”
1997년 전국에 춤바람을 일으킨 DJ DOC의 ‘DOC와 춤을’은 춤을 어렵게만 생각하던 평범한 한국인들이 춤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누구든 춤을 추고 싶을 때는 춰라, 두 손을 좌우로 흔들기만 해도 되는 ‘관광버스 춤’이나 내 맘대로 추는 ‘막춤’도 좋다! 누구나 개성대로 춤을 출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이제 그런 춤은 웃음거리일 뿐이다. 요즘 방송 전파를 타고 있는 한 TV 광고는 촌스러운 옷차림으로 막춤을 춰대는 남자를 경멸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여자들을 클로즈업하면서 춤도 학습의 대상임을 재선언했다.
춤으로 갈라지는 '신 계급시대'
이제 춤은 더 이상 나만에 의한, 나만의, 나만을 위한 존재물이 아니다. 남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자기 표현의 수단이자 자신이 어떤 문화, 어느 수준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계급적 표지이다. 춤은 더 이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몸과 패션, 경제적 여유, 문화적 취향 등과 한 덩어리가 돼 섞인다.
아무리 춤을 잘 춘다 해도 ‘이소룡 트레이닝복’을 입고는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른바 클럽에 어울리는 ‘드레스 코드’를 따라야 한다. 각각의 유행댄스에 맞는 의상과 목걸이 귀고리 발찌 등 액세서리을 제대로 갖춰야 클럽에 구경 온 ‘뜨내기’가 아닌 ‘트렌드 리더’가 된다. 힙합 댄스에는 헐렁한 골반 바지와 카고 팬츠를 입어야 하고, 이효리의 섹시 웨이브를 추기 위해선 골반이 드러나는 배꼽티와 미니스커트가 필수다.
이 같은 노출패션은 자연스럽게 몸매 관리와 연결된다. 2000년대 들어 ‘섹스 어필’이 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면서 남자들은 가수 비처럼 근육을 불리고, 여자들은 이효리처럼 날씬한 배와 일명 S라인으로 불리는 매끈한 바디라인을 갖는 게 절대절명의 지상과제가 됐다. 이 같은 기초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헬스클럽과 요가, 필라테스 학원 등에 다니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가장 매력적인 투자처는 '몸'
투자의 결과는 당장 클럽에서 확인된다. 클럽에서 멋진 몸과 패션으로 무장하고 춤까지 잘 추는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쉽게 이성과 ‘부비부비’를 할 수 있다. 투자가 몸을 만들고, 몸이 섹스 어필이라는 가장 본능적인 결과물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전지현이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오직 섹시한 춤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클럽에서 춤을 잘 추기 위해 댄스학원에서 ‘클럽 댄스’를 따로 배워야 하고, 몸매가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클럽 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연세대 조한혜정(사회학) 교수는 “몸의 시대인 후기 근대 사회에는 몸이 하나의 자본이 되고, 몸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 자체가 자기관리의 표지가 되고 있다”며 “자본이 모든 사람을 통제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성 뿐만 아니라 몸 자체도 통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근대사회를 개막한 데카르트의 명제가 이제는 ‘나는 활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액티비티즘(Activitism)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춤 열풍이 후기 자본주의의 물신화(物神化) 현상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라는 비판에 대해 조 교수는 “춤이 자기를 발견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고, 몸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과 호흡을 찾아갈 수 있다면 하나의 자기수양 방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강명석 객원기자 lennone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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