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없다”거나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 시대다. 중학생 딸아이가 선생님의 얘기를 전해 주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두 종류래요. 설명을 즉각즉각 이해하지만 시험 치기 전에 다 잊어버리는 경우, 서너번 설명을 들은 후에야 이해를 하는데 시험 시간에 머리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래요.”
아이는 덧붙였다. “머리 속으로 금방 들어왔다 금방 빠져나가는 것은 가스(gas)XXX이고,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다가 필요할 때 나오지도 않는 것은 돌(stone)XXX래요.” XXX라는 표현엔 문제가 있지만 일리가 있다 싶었다.
■노루는 위험할 것 같으면 일단 내달린다. 그런데 탁월한 질주력을 자랑하다 뛰는 멈춰 서서 두리번거리다 사냥감이 된다. 뛰는 이유를 금방 잊는 노루는 ‘쓸개가 없다’는 오해를 받는다. 쓸개가 기억력과 관계있을 리 없지만(기억력이 3초라는 금붕어도 쓸개는 제대로 있다), 노루의 쓸개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맞다.
쓴 맛이 나는 풀을 즐겨 먹는 노루는 쓸개가 혈관 모양으로 퇴화했다. 사전에는 쓸개를 ‘담낭(膽囊)’ 또는 ‘속 생각’이라 한다. 서러운 경험이나 원한을 쓸개에 비유하고(와신상담ㆍ臥薪嘗膽), 이를 잊는 사람을 ‘쓸개빠진 놈’이라고 한다.
■코끼리는 한 번 기억한 일을 절대 잊지 않는다. He has a memory of an elephant는 ‘그는 기억력이 탁월하다’는 뜻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Elephants Can Remember’는 ‘14년 전의 살인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상징적 표현이다. 하지만 코끼리가 서커스에서 ‘훈련의 기억’을 펼쳐 보이려면 오랫동안 무지무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새끼 때부터 훈련시켜야 한다. 미국에서 ‘버튼 구별하기’ 실험을 했는데 돌고래는 5번, 코끼리와 원숭이는 50번의 착오 끝에 기억을 했다. 코끼리는 돌고래가 잊은 뒤에도 오랫동안 잊지 않았다.
■“노루처럼 잘 알아듣고, 코끼리처럼 오래 기억하면 참 좋겠다.” 아이의 말이다. 아이의 얘기에 과민반응을 보인 것은 정ㆍ관계 인사들의 ‘다 아는 과거 잊어버리기’와 국회 인사청문회 주인공들의 ‘숱한 말 바꾸기’ 때문이었으리라. 정말로 세월 때문에 망각했다면 이해하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코끼리보다 정확히 기억하면서 노루보다 더 쉽게 잊어버린 듯 가장하니 흉하다. 그들은 ‘쓸개 빠진 코끼리’일까(실제 코끼리도 노루처럼 쓸개가 퇴화해 보이지 않는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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