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대법원장이 ‘솜방망이 처벌’ 논란을 빚은 두산그룹 비리 사건 1심 선고를 사실상 겨냥해 강한 유감을 표명한 사실이 알려져 파장이 일고 있다.
이 대법원장은 9일 서울 한남동 공관에서 최근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한 법관 19명과 만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이 대법원장은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엄정하게 판결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만찬 전날인 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 21부(강형주 부장판사)가 회사자금 286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된 두산 총수 일가에게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재판장이었던 강 부장판사(이번 인사로 광주지법 수석부장판사로 승진)는 이날 만찬에 초대 받았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장이 취임 이후 수 차례 밝힌 대로 화이트 칼라 범죄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발언이었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사건 당사자인 두산 측과 현재 재판이 계류 중인 재벌 총수들은 향후 재판에서 형량이 강화되는 것은 아닌지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두산 관계자는 “1심 선고 후 조용해지는가 싶었던 회사 분위기가 다시 술렁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항소심에서 실형이 선고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6부(황현주 부장판사)는 이 대법원장의 발언 내용이 알려진 17일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분식회계를 통해 금융기관에서 4,148억원을 대출 받고 8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인정됐다.
재판부는 “돈을 대출한 금융기관에 국민의 세금이 투입된 점을 감안하면 실형 선고는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쌍용건설 관계자는 “불똥이 우리에게 튀었다”고 말했다.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기업인은 1심 재판이 진행 중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항소심에 계류중인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1심 징역 4년),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징역 3년), 허태학 전 삼성에버랜드 사장(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김석원 전 쌍용양회 명예회장(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등이다.
법원 안팎의 반응은 엇갈렸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대법원장의 원론적인 입장 표명이라고는 하지만 일선 판사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두산 사건 항소심 재판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참여연대는 “곪을 대로 곪아 언젠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법원의 권력층 봐주기 관행을 지적한 것”이라며 “법 앞의 평등을 온전히 실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영윤 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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