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먹은 유진이가 슬며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이리저리 움직이는가 싶더니 귀에 익숙한 선율이 흘러 나왔다.
“어머!”어머니 유계희(52)씨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였다. 방금 전 차에서 들었던 바로 그 피아노곡이었다.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이 곡을 이전에 들려 준 적도 없었는데….
두 돌 만에 자폐아 판정을 받은 아이에게 그저 안타까운 눈길만 보냈던 오철균(52) 유계희 부부는 바로 이 순간, 희망의 빛을 보았다.
오씨 부부는 유진이가 자폐증 등의 뇌기능 장애를 가진 사람 가운데 특정 분야에 천재성을 보이는 사람, 이른바 ‘서번트’임을 알아챘다. 부부는 곧바로 유진이를 특수학교인 청주성신학교 유치부에 입학시켰고, 이 때부터 정식으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초등부, 중등부를 거치는 동안에는 작곡 공부도 시켰다. 유진이는 피아노 뿐 아니라 드럼과 트럼펫 등 다른 악기까지 자유자재로 다뤘다. 재학 시절 각종 장애인 예술제를 휩쓸다시피 했다.
유진이는 고교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갔다. 음악을 계속 할 수 있는 게 중요했기에 관악부가 있는 청주농고에 입학했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지만 이 때문에 유진이는 물론이고 오씨 부부는 숱한 마음 고생을 했다. 처음으로 일반 학생들과 어울려야 했던 유진이는 놀림을 받는 것은 예사고, 얻어 맞는 일도 잦았다. 눈에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부부는 학교 친구들을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으르기 위해 수시로 학교를 찾아야만 했다.
3년 고생 끝에 유진은 무사히 수능시험을 쳤고, 대전 배재대 음악학부에 일반전형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이 때까지 유진이와 같은 길을 걸어왔던, 역시 자폐증 환자인 일란성 쌍둥이형 윤진이는 2년제인 충청대 산업정보학과에 진학했다. 윤진이는 지금 모교인 청주성신학교의 차량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다.
16일 정오 학위수여식이 열린 배재대 21세기관 대강당. 대학 측은 재학 중 여러 차례 학교의 명예를 높인 오유진(24)씨의 공로를 인정, 학위수여식과는 별도로 특별 이벤트를 마련했다. 유진씨가 천천히 단상에 올라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머니 유씨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난 20여년의 세월이 영화의 장면 장면처럼 스르륵 지나갔다. 유진씨가 자신이 작곡한 ‘밀레니엄 소나티네’를 연주하는 내내 유씨는 애써 속으로 눈물을 삭였다.
“브라보! 브라보!” 유진씨의 연주가 끝나자 2,500여명의 졸업생과 가족, 교직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멋진 곡, 완벽한 연주에 대한 환호였고, 인간 승리에 감동받고 축하하는 화답이었다.
학위수여식이 모두 끝난 뒤에도 어머니 유씨의 눈가는 촉촉히 젖어 있었다. 유씨는 “유진이가 대학원까지 졸업한 뒤 교향악단에 연주단원으로 일하며 곡도 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귀띔했다.
유씨는 “아이들이 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늘 소원했다”며 “그 때문에 아이들의 수능시험 성적표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유씨는 “이제 우리 부부가 아이에게 더 해줄 건 없으며 사회가 이 아이들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유진씨를 인간 승리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내 주위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이웃 친구로 받아달라는 소박한 바람이다.
배재대는 이날 졸업식에서 오유진씨에게 특별공로상과 함께 대학원 전액 장학증서를 줬다.
대전=전성우 기자 swch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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