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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유전무죄가 법률적 유산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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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유전무죄가 법률적 유산이 된다면

입력
2006.02.27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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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방대법원 대법정의 대법관 의자 9개는 크기가 같지 않다. 대법관이 임명되면 몸 크기에 맞춰 새로운 의자가 제작되기 때문이다. 대법관은 평생 그 의자를 이용하다 퇴임 시 몸때 묻은 의자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의자의 크기가 다르듯 대법관들은 각자의 양심과 사법적 철학을 토대로 다수의견, 반대의견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쌓인 판결은 당대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 되고, 시대를 초월해 사회와 이념의 좌표 역할을 한다. 대법관의 의자는 퇴임과 함께 대법정에서 치워지지만 그가 그 의자에 앉아 담아내려고 한 시대정신은 법률적 유산(Legacy)으로 후대에 전해지는 셈이다.

미국 법원 전통속에서 얼 워렌 대법원장만큼 그가 남긴 법률적 유산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법관은 없다. 그가 16년 동안 대법원장으로 재임하던 동안 미국의 대법원은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 ‘미란다 사건’등 민권과 인권 향상에 기여한 진보적 판결로 미국 사회의 모습을 바꿔 놓았다.

워렌 대법원장이 임명 전부터 사법적극론자의 면모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의 워렌을 대법원장에 발탁한 것은 그가 굳건한 보수주의자라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렌은 임명 후 기존의 사고 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싹트는 민권의식을 판결에 담아냄으로써 미국 역사에 남을 진보적 판결의 금자탑을 쌓았다.

시대 정신을 읽고, 국민들에게 다가가려는 법관의 따뜻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훗날 아이젠하워는 “워렌을 대법원장에 임명한 것은 내 최대 실수”라고 토로했다고 하지만 워렌에 대한 미국민들의 존경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9일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한 법관들과의 만찬에서 화이트 칼라 범죄에 대한 법원의 무른 판결을 질타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법조계 안팎이 시끄럽다.

대법원장의 ‘법정 밖 경고’ 발언은 전날 두산그룹 비자금 사건 관련자 전원에게 1심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을 환기시키면서 법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중대 사건이라는 비판론이 나오고 있다. 이런 비판의 근저에는 대법원장 스스로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법언(法諺)을 저버렸다는 원망이 섞여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법관의 판결이 국민들이 바라는 사법적 정의와 현저한 괴리를 보일 때도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경구는 불변의 가치가 될 수 있을까.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할 법의 저울이 심각한 불균형을 보일 때 우리는 이 경구가 지니는 의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권력의 매질로부터 초연한 법관의 자세를 다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강한 자 편에 서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언어의 보호막이기 때문이다.

과거 사법부가 인권의 최후 보루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을 때, 사법 개혁에 대한 열망이 높았을 때 법관들은 “우리는 판결로 말한다”라는 보호막 속에 안주하지 않았던가.

미국 경구에 “Justice is blind”라는 말이 있다.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처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 외관상의 차별을 두지 말라는 뜻이 담긴 말이다. 이 대법원장은 두산 재판 내용을 전해듣고 세번씩이나 “한심해”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외관이 피의자의 형량을 구속하는 판결이 계속되는, 그래서 점점 국민들로부터 멀어지는 사법부를 이끄는 수장의 깊은 탄식으로 들린다. ‘유전무죄(有錢無罪)’가 사법적 유산으로 이어지는 현실이 앞에 있는 한 “판결로 말하라”는 경구를 깨는 대법원장의 질타는 계속돼야 한다.

김승일 사회부장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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