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는 길 위의 감독이다. ‘파리, 텍사스’(1984) ‘랜드 오브 플렌티’(2004) 등 그의 작품 대부분은 자연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여행에서 인생의 의미를 길어 올리고 때로는 삶의 불가해한 심연으로 빠져든다. 그의 신작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도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로드무비의 길을 달린다. 그리고 존재 의미를 잃어가는 가족이라는 고루한 단어에서 희망을 모색한다.
서부영화의 거물 스타였지만 이제는 한물간 중년 배우 하워드(샘 셰퍼드)는 독신으로 살면서 술과 여자,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보낸다. 그는 어느날 촬영장에서 몰래 도망쳐 나와 30년 만에 고향 네바다로 향한다.
하워드는 신용카드도 없애고 입던 옷도 벗어 던지며 자기의 존재를 지우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서부 어느 곳에 자신이 모르던 피붙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새 삶을 찾아 나선다.
하워드는 어렴풋이 남아있던 기억을 나침반 삼아 과거 속에 두고 온 옛 연인 도린(제시카 랭)과 아들 얼(가브리엘 만)을 만난다. 담담하게 하워드를 대하는 도린과 달리 얼은 아버지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며 하워드를 차갑게 대한다. 그러나 배다른 동생 스카이(사라 폴리)가 하워드와 얼 사이를 이어주며 흩어졌던 가족은 첫 만남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돈 컴 노킹’은 한 중년 남자의 뒤늦은 행복 찾기와 정체성 회복을 다루는 영화이자 미국 사회의 현실을 되짚어 보는 우화이다. 서부영화는 미국적 신화와 꿈의 표현이며 하워드는 그 상징이다. 미국적 가치를 대변하던 서부영화가 20세기 후반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미국 사회의 중심이던 가족도 조금씩 해체돼왔다.
벤더스는 하워드의 여정을 뒤따라가며 분열의 과정을 거슬러 가족관계를 복원하고, 그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다. 서부의 황량한 사막처럼 메말랐던 하워드의 가슴에 존재조차 몰랐던 가족이 오아시스가 되어 준 것처럼, 미로에 빠진 미국 사회에서 결국 가족만이 출구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극본 ‘매장된 아이’로 퓰리처상을 받은 샘 셰퍼드가 ‘파리, 텍사스’ 이후 21년 만에 벤더스와 의기투합해 각본까지 썼다. 실제 부부인 셰퍼드와 제시카 랭이 펼쳐내는 연기 앙상블은 잔잔한 웃음과 감동을 만들어 낸다.
최근 작품들이 너무 난해하거나 평범하다는 혹평을 들었던 벤더스가 어깨 힘을 빼고 다시 예전의 명성에 가까운 연출력을 보여주는 것도 눈 여겨 볼만 하다.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랐으며 유럽영화제 촬영상을 수상했다. 23일 개봉. 15세.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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