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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53> 대안적 미래의 공중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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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53> 대안적 미래의 공중낙원

입력
2006.02.27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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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기본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을 보다 잘 살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현대 대도시의 건축물들은 인간의 삶을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만들어진 구조물에 인간을 적응시키는 데 목적을 두는 듯 보인다.

문외한으로서 감히 할 얘기는 아닌 줄 알지만, 가끔씩 고층건물에 올라 내려다보는 서울 시내의 스카이라인은 어느 방만한 신의 사생아가 멋대로 그려놓은 낙서인 양 중구난방으로 어지러워 보인다. 막대를 박듯 수직으로 꽂아놓은 건물들이 녹지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모양은 무례한 침범자의 말뚝처럼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그건 필시 보호 받아야 할 어떤 근본적인 존엄성이 난자당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 존엄성은 인간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자연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해 거대한 말뚝들이 뭉개고 있는 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어떤 친밀한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그 원형은 인간의 가공물들이 자연을 점령하기 이전 시절의 원시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향수는 인간과 자연이 한데 어울려 살던 시절을 마냥 그리워하는 것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현대 도시의 과밀화한 자연 훼손은 과거보다는 미래의 파괴 쪽에 더 가까워보인다.

모든 인간의 유전자에 자연과 친밀했던 시절의 기억이 내장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시에서 평생을 살아온 인간에겐 도시생활이 주는 편리함에 대한 기억이 동시에 내장되어 있다.

때문에 도시의 인간은 완전한 자연에서 제대로 적응할 수 없다. 자연을 개간하여 문명을 발전시킨 인간은 환경을 자신의 논리와 의지로 개척함으로써 세계의 지도를 매 순간 바꾸려는 노력을 필연적으로 강행하기 마련이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인간의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며 인간과 자연의 영역을 친밀한 상호보전의 법칙으로 공생케 함으로써 물질적 우주의 영원한 진화를 꿈꾸는 건 현대 인간의 기본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 파올로 솔레리가 미국 애리조나 고지의 현무암 사막지대에 설계한 ‘아르코산티’(Arcosanti)는 바로 그러한 상상과 노력의 산물이다.

아르코산티는 건축과 생태학의 합성어인 아르콜로지(Arcology)와 반물질주의를 뜻하는 코산티(Cosanti)를 합친 말로 완전한 환경도시를 뜻한다. 이를테면 기존에 주어진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그것과 상생하는 인공의 도시를 친환경적으로 건설한다는 것이다. 일말의 자연파괴 없이 건설된 그 도시는 ‘신자연’이라 불리는 보다 진화한 양상으로 발전함으로써 인간의 정신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파올로 솔레리는 과학적 혁명이 인간을 지배하면서 과학적 결정론을 섬기게 된 것이 인류를 자연과 대척점에 놓이게 한 인간의 실수라 진단한다.

그 유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솔레리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건축적 역량과 철학적 신념을 애리조나의 사막에 투여했다. 거친 사막을 일구어 하나의 거대한 숲처럼 유기적으로 살아 숨쉬는 도시를 창조하는 것이 그가 가진 궁극의 목표이다.

“나는 도시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시각, 즉 도시와 관련성을 가지고 도시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시각을 열어 줄 개념들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존재하는 것들을 파괴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에 무엇인가를 보태 나가는 방법들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 그 방법은 결국 사회와 환경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로 귀결될 것이다.” - 파올로 솔레리

“우리는 인간을 다시 찾아야 한다. 생태와 자연, 우주의 본질적 법칙들이 교차하는 선들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20세기 건축의 영웅 르 코르뷔지에였다.

파울로 솔레리는 학생 시절 모더니즘의 선구자로서 건축과 관련한 혁명적인 사고를 실천했던 르 코르뷔지에를 존경했지만, 그의 건축에 실제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또 다른 영웅,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였다.

규모와 상관없이 건축의 모든 구성요소들이 전체 설계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일관된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라이트의 건축적 신념은 “소형화의 범주와 복잡화의 범주 사이에는 총체적인 관련성이 있으며 이 두 가지 모두 기술을 통해 혁명에 이를 수 있는 진정한 지침들”이라고 말하는 솔레리 건축이론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솔레리의 미래도시 개념의 핵심은 복잡성과 유기체성이다. 솔레리는 지질학과 생물학을 바탕으로 인간 정신을 끝없이 진화하는 물질로 파악한 신학자 테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에서 자신의 미래 비전의 힌트를 얻었다. 솔레리는 ‘복잡성의 집약체로서 신을 한번 받아들여보라’고 권한다.

그 ‘복잡성의 집약체’는 ‘무한의 의식, 무한의 공존, 무한의 연대, 무한의 지식, 무한의 이해, 무한의 사랑, 무한의 총합’으로 나아가 궁극에는 인간의 신념과 노력으로 구현된 신의 실체를 만나게 한다. 솔레리의 아르코산티는 건축을 통해 구현되는 신의 현현이라 할 수 있다.

그 현대의 신을 구현하기 위해 솔레리는 도심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점점 교외로 뻗쳐 나가는 이른바 스프롤 현상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쉽게 말해 그건 도시의 삶에 염증을 느껴 교외에 전원주택을 짓고 유유자적하겠다는 편협한 이기주의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현대 도시의 시스템에서 도시를 버리고 전원생활을 하는 건 도심에서 필요한 에너지와 자원 등을 고스란히 교외에 옮겨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건 도심의 폐해를 교외로 확장함으로써 자연 파괴를 부추기고 인간과 자연의 유기체적 질서를 더욱 어지럽히는 일이나 진배없다.

솔레리가 주창하는 미래도시는 현대 도시를 이루고 있는 단순한 물리적 법칙의 충돌 현상들을 상호교류로 변환시켜 다용도 공간을 활용하고 태양열을 이용하여 조명 및 냉난방을 자연에너지로 순환시키는 등 유기체의 내부적 복합성을 집약시킨 거대한 순환구조 시스템으로서의 대안적 공간이다.

그곳에선 소위 도시적 요소라 여겨지던 교육과 문화, 생산, 서비스, 놀이 등을 자연 상태의 시골에서 자유롭게 공유하게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 정신의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강퍅한 도심에서 메마르게 구획되어온 인간의 사고에 새로운 활력과 역동적인 생기를 불어넣는 데 기여한다. 솔레리는 건축이 이토록 엄정한 정신적 행위임을 새삼 강조함으로써 세계의 혁명적 변화를 꿈꾸는 현대의 다빈치이다.

1969년 첫 디자인이 나온 이래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솔레리는 애리조나의 사막에 칩거해 자신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려 고심중이다. 그것은 젊은 시절부터 솔레리가 수 천 장의 종이 위에 스케치한 다양한 미래 도시 형태-바다 위 도시, 다리 위에 매달린 도시, 지구 밖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도시 등-들의 원형을 창조하는 일이었다.

건축적 구조물과 환경을 조화롭게 혼합시키는 것에서 출발한 이 프로젝트는 아직 그 원대한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솔레리는 ‘너무 앞서가면 지루하다’면서 짐짓 여유를 보인다. 이런 여유는 자만이 아닌, 오래 숙고된 사상적 깊이와 겸허한 확신에서 느긋하게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미래도시의 건설이 당대의 협소한 평가기준 아래서 한시적으로 완성되기 보다는 끝없는 실험과 재고를 반복하며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인류의 과업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도시의 발달이 수 세기의 시간을 거쳐 진행되어 왔듯 미래도시 역시 현재의 토대 위에서 쉼 없이 생성되는 제약과 한계들을 매 순간 극복하면서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낸다.

그것은 한 사람의 위대한 상상의 산물일수도 있지만, 자연과 배를 맞대고 하늘을 머리에 얹은 채 살 수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필요가 아니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이 창조한 도시가 인간을 몰아내는 시대에 환경은 인간에게 벼랑 끝의 삶을 되돌려준다. 미래 도시는 그 벼랑 끝에 세워지는 이상적 상생의 공중낙원이지만, 그 허공의 안락처에 다리를 놓고 기둥을 심는 건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와버린 오래된 미래의 중앙에 다리 없이 서 있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솔레리의 아르코산티를 생각하며 그 잃어버린 다리를 떠올려 보게 된다. 그렇다. 한 시인의 시구를 변용하자면, 미래는 오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지나가는 것이었다. 발 없이 빠르게.

시인 강정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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