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다양성을 존중하는가? 과연 문화적 다양성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는가? 우리나라 미디어는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문화적 다양성의 중요함을 알려주고 있는가?
세계 곳곳의 이질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치자면, 텔레비전에는 오지 탐험 프로그램이 있고 신문도 시시때때로 외국의 문화와 역사를 기획, 보도하니 그런대로 역할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게 정말 다일까?
미국의 프로 미식축구 선수 하인스 워드가 슈퍼볼에서 MVP로 선정되면서 갑작스런 스타가 됐다. 사실 그는 갑작스런 스타가 전혀 아니다. 최근 5년간 미국의 최정상급 선수로 자리매김하면서, 웬만한 스포츠 팬들은 다 알던 선수다. 한국계 선수가 좋은 활약을 보였다는 단신 정도만 보내던 국내 언론들은 갑자기 그와 그의 어머니를 ‘한국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인터뷰를 하려고 안달이고, 특집 프로그램을 급조해서 긴급 편성한다. 하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다는, 또 한국의 방송사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그 어머니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언론이 그녀의 콩나물무침과 수제비를 찬양할 때, 워드에 대한 관심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보여달라며 호소하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워드가 미국에서 혼혈로 성장하며 겪었던 아픔을 칭찬할 때, 공식 집계조차 나오지 않는 한국의 혼혈들, 특히 ‘코시안’들에 대해서는 왜 언급이 없는지.
덴마크의 율란츠 포스텐지에 게재된 만평 하나가 전 지구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종교를 조롱해선 안되는 무슬림의 전통과 종교에 대한 풍자는 언론의 자유라는 서방 언론의 충돌이었다.
이것은 법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다양성의 문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다 해도 히틀러를 칭송하는 보도는 금기시돼 있다. 잊을 수 없는 고통을 당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배려이다. 십자가를 맨 히틀러 만평은 차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데 많은 서구의 언론과 지식인은 무슬림의 문화적 전통을 무시했다. ‘자유’라는 서구의 가치에 대한 집착이 상대적 약자인 수 억의 무슬림들에게 불을 던진 셈이다. 우리나라 언론들은 언론의 가치와 문화다양성의 가치가 만나는 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문화적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작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촉진을 위한 협약’이다. 스크린쿼터나 방송쿼터를 정당화하는 규정으로 받아들여지는 협약이지만 여전히 핵심은 ‘문화다양성’이다. 한국 상업영화의 극장 점유율이 99%라면 스크린쿼터의 승리일 수는 있어도 문화다양성은 실패다.
할리우드의 점령을 걱정하는 영화계의 우려에는 공감하지만, 우리가 남미나 아프리카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러시아, 인도 등 영화강국의 영화에도 일말의 애정을 보여왔는지 궁금하다.
미국식 블록버스터나 코미디가 ‘대박’을 낼 때, 배고픈 작가들의 단편ㆍ실험ㆍ예술영화에 어떤 지원을 해왔는지 궁금하다. 국내의 대표적인 시네마테크인 서울아트시네마는 후원금 1,000만원을 채 모으지 못해 발을 구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나라 언론들은 스타의 1인 시위 사진을 찍기만 바쁘다.
중국에서 한국 문화상품에 대한 규제를 할 때 소리 높여 비난했던 언론들은 지금 와서 추상적인 문화주권을 강조한다. 스크린쿼터 문제를 경제적 실익 여부로 계산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핵심은 경제가 아니라 문화이고, 주권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나 이외의 사람을 잘 이해하는 일은 물론 쉽지 않다. 하물며 외국의 역사와 문화, 삶을 알고 공감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사람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도 미국ㆍ일본만이 아닌 베트남이나 몽골, 브라질이나 콩고에 대해서도 조금쯤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해해야 한다. 해외여행이 빈번해진 요즘, 관광지는 다녀와도 그 나라 역사는 잘 모르고, 어느 지역에 가든 한국식당과 분위기 좋은 술집만 찾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언론이 무엇인가는 해주기를 바란다.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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