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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52> 짐승 같은 본능에 대한 영화적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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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52> 짐승 같은 본능에 대한 영화적 통찰

입력
2006.02.1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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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강퍅한 성격이나 체질에 맞는지에 대한 점검도 없이 고양이를 키운 지 8개월 가량 되었다.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지만, 최근 들어 짐승을 키우는 게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다. 가장 힘든 건 고양이가 (내가 보기에)별 이유도 없이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며 울부짖을 때다.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난감하고 처연하다. 어떤 질박한 감정이 묻어있는 듯 여겨지긴 하지만, 백 마디 말을 갖다 붙여도 설명이 안 되는 그 표정은 인간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짐승들의 정서와 감정이 따로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지게 한다. 그러면서 수 년 전에 본 영화 한편이 떠오른다.

멕시코 출신의 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이다.

스페인 말로 ‘아모레스(Amores)’는 ‘사랑’이고 ‘페로스(Peros)’는 ‘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개 같은 사랑’ 정도가 된다. 아닌게아니라 이 영화에서 개는 이야기의 단순소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주제이고 주인공이다.

세 편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우연한 교통사고를 통해 연결된다는 설정은 타란티노가 ‘펄프픽션’에서 써먹었고(그 이전에도 써먹은 감독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선 개그맨 김국진을 스타로 만들었던 ‘테마게임’류의 드라마에서도 자주 애용하던 형식이다. 그러니 그걸 두고 새롭다고 말하는 건 별 설득력이 없다.

영화 도입부에 주인공 옥타비오가 난폭하게 차를 모는 장면에서 사용된 긴박감 넘치는 핸드헬드 촬영도 과감하긴 했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러니까 결론을 얘기하자면 내게 이 영화는 전혀 새로운 영화가 아니었다. 난 영활 보고 새롭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말들에 한번도 공감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꼭 새롭다는 게 좋은 건지 어떤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내게 늘 새롭거나 새롭지 않은 얘기를 전혀 새롭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주는 오래된 친구 같은 거다. 왜, 가까운지 안 가까운지도 모를 만큼 가까워서 되레 너무 안 가깝게 여겨지는 그런 친구 있잖은가 말이다.

영화란 그렇듯 기시감의 총화다. 새롭다 어떻다 하는 얘기들은 그러니까 영상화된 기시감에서 스스로를 분리시키려는 허망한 노력처럼만 여겨진다. 그러면서 뭔가(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억지스런 희망이 이미 닳고 닳은 영상의 표면 위에 덧칠된다. 사실, 시각이란 자의적이기 마련이고 그 자체로 이물스런 환영들을 극대화시킨다.

영상은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환각효과다. 그 만큼 전염성이 강하고 치밀한 조작이 용이하다. CF영상의 최면효과를 새삼 부연할 생각은 없지만, 여하간 영화를 본다는 건 시각을 통해 모든 감각을 몸 밖으로 끄집어내 전신감각적인 착각 상태에 빠지는 걸 의미한다.

‘아모레스 페로스’를 보면서 나는 줄창 뭔가 다른 화면, 다른 배우, 다른 대사, 다른 사랑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이 야심만만한 젊은 감독이 소위 ‘할리우드키드’식의 무의식적인 짜깁기를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니, 그렇더라도 뭐 그 감독을 탓할 바는 아니다. 단지, 형식미가 과도하게 느껴지는 영화들에서 으레 느껴지는 이런 착종은 어쩌면 영화가 지향하는(또는, 지향해야 할) 미래의 법칙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다.

뤼미에르 형제 이후 영화는 어쩌면 여러 겹의 층위들이 단순확장하면서 움직임의 폭과 화면의 밀도를 넓혀온 건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영화보기를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내게 스크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차창 풍경과도 같다. 따라서 거기엔 그 어떤 완결된 스토리나 메시지도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영화가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 나는 곧잘 딴 생각에 빠지고, 보여진 영상 안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그림들을 좇아 망막을 크게 굴린다. 온갖 화려한 영상기법이 출몰하는 ‘아모레스 페로스’를 보면서 내 뇌리에 들러붙은 건 다름아닌 개들의 눈동자였다.

이미 말했듯 ‘개 같은 사랑’이란 제목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그 자체로 노골적인 직언이다. 폭력적인 형에게서 형수를 구출해 달아나려는 젊은 옥타비오는 투견을 해서 모은 돈을 그보다 몇 단수 위인 형과 형수에게 갈취 당한다. 배신과 실연의 회한에 빠질 틈도 없이 옥타비오는 자신의 충견 코피에게 물어뜯긴 개들의 주인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고는 무지막지하게 도로를 내달린다.

이게 이 영화의 첫 장면인데, 화면을 들었다 놨다 하는 듯한 엄청난 질주감에 넋을 놓고 있는 어느 순간, 끔찍한 교통사고가 발생하면서 화면이 플래시백된다. 옥타비오의 일화는 그 이후에 나오는 스토리다. 그러면서 옥타비오의 차와 충돌한 패션모델 발레리아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두 번째 이야기로 전개된다.

잘 나가던 모델이었던 발레리아는 그 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된다. 그녀는 가정을 팽개치고 그녀와 살림을 차린 유부남 다니엘에게 온갖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러다가 새로 입주한 집의 마룻바닥에 발레리아의 애견 리치가 갇힌다. 발레리아의 절망과 슬픔은 극에 달한다. 이 때 이 영화는 꼭 이브 몽탕 같은 배우가 출연한 무슨 프랑스 애정영화를 연상케 한다.

그러다가 진정한 ‘개판’은 세 번째 이야기에서 펼쳐진다. 전(前) 사파티스타 대원이었던 청부살인업자 엘 치보. 그는 마치 개들의 동네에서 셋방살이하는 듯한 몰골로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옥타비오와 발레리아의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옥타비오가 죽고 다리에 중상을 입은 발레리아가 병원에 실려 가는 사이 엘 치보는 피를 흘리면서 신음하고 있는 옥타비오의 개 코피를 집으로 데려와 치료해준다.

코피는 놀랄만한 회복속도와 엄청난 식욕을 자랑하다가 급기야는 엘 치보의 집에 살던 모든 개들을 물어 죽인다. 이복동생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처한 엘 치보가 이 상황을 목격하곤 분노에 차 코피에게 총을 겨누는데, 그 순간 엘 치보를 구슬프게 쳐다보는 코피의 눈.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압권의 연기라고 말하고 싶은 그 눈은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다. 그러면서 슬프다. 그 순간 나는 엉뚱하게도(또는, 당연하게도) 개를 어떻게 훈련시켰길래 개에게서 저런 표정을 이끌어냈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그 개의 눈은 이 영화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미끄덩하고도 질퍽한 입구처럼 여겨졌다.

물론 결과론적인 당착이긴 하지만, 2시간이 훨씬 넘는 지루한 러닝타임을 이끌고 온 게 바로 저 짧은 순간의 개의 눈빛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개는 전반부의 투견 신에서도 저 토록 징한 표정을 여러 번 ‘연기’했었던 것 같다.

추측컨대 그 개의 눈에는 촬영 내내 인간들이 벌인 그 요란벅적한 해프닝들이 한없이 측은해 보였던 건 아닐까 싶다. 진짜로 상대방 개를 물어뜯어 죽이고 인간이 겨눈 총 앞에서 용서를 갈구하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 그 개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개는 인간들을 위한 한 편의 영화를 촬영하면서 자신의 모든 걸 걸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개가 살아 남기 위해선 가끔 동물적 본능 그 자체에 삶과 죽음 모두를 맡겨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아모레스 페로스’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런 ‘개 같은 본능’에 대한 절절한 통찰이었다. 이 영화의 모든 슬픔과 정열은 거기에서 나온다.

적어도 이 영화에 나오는 개들은 사소한 욕망과 고통 사이를 허겁지겁 좇아가는 인간보다 솔직하고, 때로 근엄하기까지 하다. 총구 앞에 선 코피의 눈은 그러므로 이 영화가 숨긴 진정한 통찰의 유리창이다. 거기엔 욕망과 분노에 관한 투명한 진실 외에 다른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들의 눈빛은 읽히지 않는다. 다만, 때 되면 떠오르는 햇살처럼 그저 반짝이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인간들은 그 반짝임에도 이유와 설명을 단다. 비웃음을 감수하고 말하건대, 막 발정을 시작한 우리집 고양이에게서 그저 바라보고 우는 법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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