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들은 권력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적 권력'으로 주어진 경기규칙 내에서 결과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끌어내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임금협상에서 인상률이 고용주와 노동자 중 어느 쪽에 유리하게 결정되느냐를 결정하는 능력이다.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구조적 권력'으로 경기규칙 자체를 정하고 바꾸는 더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능력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임금인상 요구에 화가 난 기업이 공장을 아예 외국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다.
●'기업도 파업''강 교수 직위해제'
주목할 것은 정부가 친노동자적 법안을 제정할 경우 공장들을 해외로 이전함으로써 기업인들도 파업을 할 수 있다는 한국경영자협회 이수영 회장의 협박성 발언이다. 그렇다. 그 사회가 자본주의인 한, 아무리 노동운동이 강한 것 같은 나라에서도 궁극적인 권력인 구조적 권력은 자본이 쥐고 있고 그 힘의 근원은 자본의 파업이다.
그리고 자본의 파업은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를 필요도, 가두시위를 할 필요도 없다. 대신 골프나 치고 투자 등을 하지 않고 놀고 있으면 된다. 그럴 경우 경제가 마비되기 때문에 모두들 자본에 꼬리를 내리게 된다.
사실 재계는 그동안 이 같은 파업을 통해 여러 정권을 길들여 왔다. 예를 들어 최초의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출범 초기 개혁정책을 펴자, 기업들은 자본의 파업을 벌여 금리 인하와 대출확대조치에도 불구하고 투기적 투자는 두 배나 늘린 반면 생산적 투자는 오히려 줄였다. 김영삼 정부는 결국 압박에 굴복하여 최소한의 재벌개혁도 포기해야 했다.
자본의 힘을 실감케 하는 또 다른 예가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강정구 교수 사태이다. 강 교수는 한국전쟁은 통일전쟁이라는 글을 썼다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된 상태인데 동국대가 한 술 더 떠 강 교수에 대해 직위해제조치를 내린 것이다.
물론 아무리 강 교수 글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를 처벌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검찰의 기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동국대가 유죄판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사법적 원리를 무시하고 형이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 교수에 대해 교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수업권을 빼앗는 중징계인 직위해체 조치를 내린 것도 말이 되지 않긴 매한가지다.
문제는 5년 전 강 교수가 만경대 사건이라는 비슷한 사건으로 기소됐을 때 징계를 하지 않았던 동국대가 이번에는 서둘러 징계를 한 이유이다. 그 주된 이유는 이번의 경우 재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재계를 대표하는 대한상공회의소의 부회장이 강 교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 취업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충격적인 협박을 하고 나선 것이다.
●자본의 독재가 우리를 지배
그리고 이 같은 협박에 따라 강 교수 때문에 졸업생들의 취업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한 동국대는 재계에 대한 아부전략으로 직위해제결정을 내린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자본의 힘이 얼마나 무섭고, 말 한마디로 대학의 자율성, 그리고 교수와 학생의 수업권을 헌신짝처럼 짓밟을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불교재단인 동국대의 결정이 보여주듯이 자본의 힘 앞에서는 부처님의 자비정신도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기업들이 교수들의 사상을 조사해 분류한 사상분류표를 만들고 이에 기초해 취업 지망생들의 수강기록을 검토하고 취업 여부를 결정하는 '한국판 1984년'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군사독재로부터 벗어나 숨 좀 쉬고 사나 싶었더니 군사독재보다 무서운 '자본의 독재'가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있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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