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분야의 스테디셀러인‘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이 가진 역사관을 정면으로 비판하는‘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출간되면서‘우리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새삼 쟁점이 되고 있다. 논쟁은 학계 뿐만 아니라 과거사 청산 등 정치적 사안과 맞물려 대중적인 관심사로도 등장하고 있다. ‘해전사’와‘재인식’이 한국 근현대사에 어떻게 접근하며 어떻게 보고 있는지, 한국 근현대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등을 두 책의 주요 필자를 만나 직접 들었다.
■ '해전사' 필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해전사’에 ‘해방 직후 지식인의 민족현실 인식’ 등의 글을 실은 임헌영(65)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재인식’이 과거 우리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눌렀던 이분법적 역사관을 강요한다고 비판했다. 흑백 논리로 역사를 재단하고 ‘해전사’를 한쪽 편에, ‘재인식’을 그 맞은 편에 둠으로써 대결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재인식’은 ‘해전사’가 민족지상주의에 빠져 있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돼 있다고 비판하는데.
“동의할 수 없다. 민족지상주의가 무엇인가. 우리 민족만을 생각하고 다른 민족은 배제하는 것 아닌가. ‘해전사’는 결코 그런 책이 아니다. 다만 강대국에 의해 워낙 시달렸기 때문에,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과 동등하게 살수 있어야 한다는 시각을 견지했을 뿐이다. 외세가 생존권을 위협할 때, 우리 민족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이것을 민족지상주의라고 몰아붙여서는 안된다. 민중혁명 필연론, 이데올로기적 편향 등을 지적하는데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국민이 잘못된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민중혁명이 아니라 민주주의다. 독재 권력을 그냥 두고 보라는 것인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해방 이후 집권세력이 가장 편협했었다.”
-필자의 한 사람으로서 ‘해전사’를 평가하면.
“1979년 제1권이 나올 당시만 해도 대학에서조차 한국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지식인 사이에서는 현대사를 제대로 보자는 인식이 팽배했고 ‘해전사’는 그런 요구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책이다. 당시 ‘해전사’는 해방 공간의 한국 역사에 대한 가장 깊이 있고 진지한 연구의 성과였다. 글을 쓸 때도 고민이 많았다. 가령 친일문제를 다룰 때, 식민지배의 폭력성 앞에서 누구나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필자들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친일 인사 개인에 대한 원한보다는, 그 같은 비극이 되풀이돼선 안되겠다는 일념에서 글을 썼다. 이후 수십 만 명이 책을 구입했다. ‘재인식’은 이런 책의 성격을 좌파민족주의라는 말로 너무 쉽게 규정했다.”
-그같은 성격 규정에 어떤 문제가 있단 말인가.
“역사를 냉전적인 시각으로 보려는 것 같다.‘해전사’의 내용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면, 왜 틀렸는지를 명확한 근거를 대서 지적하면 좋겠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 두 책에 나타난 역사 인식의 차이를 대결주의의 관점에서 부각시키는 것 같다. 물론 ‘재인식’에도 우리 역사를 진지하게 살피는 글이 적지 않다. 그러나 지나치게 공격적인 몇몇 글들이, 내용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해방 당시의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제대로 된 우리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국민이 자기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고 민주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시기였는데 외세와 그에 영합하는 정치 세력 때문에 좌절됐다. 민족적 역량도 이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다.”
-‘해전사’나 ‘재인식’ 모두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현상이든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 다양한 시각,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는 것은 학문과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서로 견해가 다를 때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논거를 찾기 위한 노력, 그리고 이에 근거한 치열한 논쟁은 학문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재인식’이 그 같은 학문적 논쟁을 제기하는 게 아니라 흑백 논리에 매몰돼 있어 아쉽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 '재인식' 편집위원 이영훈 서울대 교수
이영훈(55)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인식’에 실린 첫 글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를 통해 ‘해전사’의 여러 논문들이 ‘1980년대 좌파민족주의 진영의 정치학에 충실한 실천적 역사쓰기에 다름 아니었다’고 비판했다. ‘재인식’ 편집위원 4명 중 한 명인 그는 “학술적인 글로는 거의 한계에 이를 정도의 표현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해전사’의 비판적 극복을 모토로 내건 이유는.
“최근 10년 동안의 선진적 연구성과를 소개한다는데 의미를 뒀고, 논의의 효율성을 위해 ‘해전사’를 과녁으로 삼은 것뿐이다. 특정 집단을 비판하거나 이데올로기 편향이라고 매도할 의도는 없다. 다만 국내에서 좌파민족주의의 역사관에 근거한 역사서술이 지배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그런 인식이 정치권과 결합해 사실에 대한 정확한 검증도 없이 과거사 청산 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두고볼 수 없었다.”
-‘해전사’의 어떤 역사의식이 문제인가.
“제1권에 실린 송건호 선생의 글에도 나타나 있듯이 ‘해전사’는 소수의 친일, 사대주의자가 나라를 망쳤다는 식의 역사의식에 근거한다. 이런 경향은 젊은 학자들이 다수 참여하는 제5권까지 마찬가지다. 친일파의 청산을 말하는데, 아직 제대로 연구조차 돼있지 않은 상황에서 근본주의나 선악 이분법적 사관에 빠져 일방을 몰아부치는 식이 돼선 안된다. 이런 방식의 과거사 청산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인 과거사 청산은 안된다는 말인가.
“죽은 자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역사학자만의 몫이다. 역사학자들은 사실과 자료에 근거한 연구 결과물로 역사를 성찰할 수 있는 화두를 던진다. 대중이 판단하고 깨치도록 돕는 것이다. 죽은 자의 망령이 현실 정치를 붙들게 해선 안된다. 정치는 미래를 기획하고 설계하는 것이다.”
-80년대라는 시대적 맥락에서 ‘해전사’를 평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복합적인 시대상을 반영했지만 그 책을 당시의 한국 지성계를 포괄적으로 대변하는 책으로 읽을 순 없다. 80년대는 억압의 시대였지만 개항 이후 100여년만에 처음으로 수출 흑자가 난 시대다. 그런 점을 모른 척하거나 아예 부정한다면 당시를 살았던 대부분의 실업가와 공직자, 나아가 다수 국민은 미아(迷兒)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해전사’는 실증적 틀이 너무 약하다.”
-‘재인식’ 필자 중에서도 ‘재인식’에 실린 이 교수의 글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
“책에 실린 글들은 이미 국내외 유수 학술지에 발표된 실증적 조사와 연구에 근거한 뛰어난 논문들이다. ‘탈민족주의로 다시 쓴 한국 근현대사’라는 기획 취지에 찬성해 게재를 허락받은 것일 뿐, 필자들이 모여 의견을 제시하고 책의 세세한 성격까지 규정한 것은 아니어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나의 글도 그 중 한 편일 뿐이다. 그래서 총론이 없다. 독자들이 읽고 판단하라는 거다. 내 글의 표현이 심하다는데, ‘해전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해전사’가 우리 역사를 비하하고, 그런 역사인식이 대중에 퍼져 있는 것이 심각하다고 생각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 교수는 “역사학자는 자기가 본 범위 내에서 신중하게 역사를 이야기해야 한다”며 “특히 국가의 정통성, 흥망성쇠를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가의 “존귀”한 역사를 충분한 근거도 없이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 해전사^재인식 재인쇄 돌입‘뜨거운 관심’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서점가에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출판사인 책세상은 1쇄분 2,000질로 9일시판에 들어갔으나 재고가 떨어지자 12일2쇄(3,000질) 인쇄를시작했다. 독자가 한정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최근 이렇게 빨리 다음 판을 찍는 사례는 매우 드문일이다. 이에 대해 책세상 관계자는“독자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자 서점측이 책을 충분히 확보하는 차원에서 추가 공급을 요구, 2쇄를 찍었다”고말했다. 한편 한길사도‘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을 조만간 시중에 다시 내놓기로 했다. ‘해전사’1권은 79년에 처음 나왔고 2004년개정판이 출판됐으나 이마저다판매돼
최근개정판2쇄인쇄에들어갔다. 한길사관계자는“1권의재인쇄는‘재인식’의출판과는관계없는일”이라면서도“‘재인식’이나온뒤‘해전사’를구할수있느냐는 문의가 전보다 많이 늘었다”고말했다. 한길사는 전자책으로만낸2~6권개정판도 적은 분량이나마 책으로 내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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