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끄는 일을 천직으로 생각해 온 소방관이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정년이 보장되는 그 좋다는 공무원 자리를 마다하고 택한 길은 마술사다. 서울 강남소방서 수서파출소 정영권(41) 소방교. 소방관 생활을 하면서 소외 이웃에 마술 공연을 베풀어 ‘소방관 마술사’로 알려진 주인공이다.
“4월이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지 꼭 20년 되는데 이제 남은 인생에 마술을 걸어볼 참입니다.”
어릴 적 마술해법 방송을 본 뒤 마술의 매력에 빠진 정씨는 명절이면 각 방송사에서 경쟁적으로 방영하던 외국의 마술쇼를 빼놓지 않고 보면서 꿈을 키웠다. 소방관이던 외조부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하루 일하고 하루 쉬면 그 쉬는 날에 마술을 실컷 할 수 있다”는 것도 소방관일을 택한 중요한 이유였다.
그렇게 마술을 연마해 10년 전부터 양로원, 고아원 등의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 무료 공연을 하고 있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의 얼굴이 마술을 구경하면서 환한 웃음으로 바뀌는 모습을 볼 때 마술을 하는 자신도 기뻐진다는 걸 알게 된 탓이다. 지금도 1주일에 1, 2차례 정도는 어려운 이웃을 찾아 공연을 한다.
현재 그가 구사할 수 있는 마술은 약 1만 가지. 하지만 자만할 수는 없다. 기본 실력만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마술을 한번만 보고도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익힌 기술로 매번 우려 먹는 다른 일과 달리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고 노련하게 연출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는 일의 반복입니다.” 소방관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한 것도 마술 개발에 더 시간을 쏟고 싶어서다. 고맙고, 미안한 건 역시 가족이다. 15년 넘게 직장에 다니고 있는 부인의 지원이 없었다면 퇴직 결정은 불가능했다.
이제 마술에 묻혀 지낼 수 있게 되지만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운전을 좋아하는 것과 택시 운전을 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마술을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하게 되면 마술이 싫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사람들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어 정씨는 행복한 표정이다. “자폐증 정서지체 장애아 등 의사 표현을 제대로 못하고 오랫동안 집중 못하는 분들이 제 손 동작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박장대소하곤 해요. 그런 웃음이 제가 마술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하는 힘입니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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