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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시그림책 '맑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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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시그림책 '맑은 날'

입력
2006.02.1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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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어쩌면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구비구비 애달팠던 한 세월을 거두고 저승으로 훌훌 떠난 할머니와 그를 보내는 남은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을 시인은 시로 썼고, 화가는 시만큼이나 아름다운 그림을 붙였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섬진강 24-맑은 날’과 일러스트레이터 전갑배 교수(서울시립대)의 그림이 만난 시 그림책 ‘맑은 날’이다.

원작은 시인이 할머니의 초상을 치르면서 떠오른 시정을 옮긴 아주 긴 시로, 어른들 보는 시집(창비시선 56 ‘맑은 날’, 1986)에 들어 있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 할머니를 잃어 허허로운 시인의 마음이 섬진강 강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는 작품이다.

20년 만에 다시 그림책으로 펴내면서, 어려운 낱말이나 표현은 쉽게 고치고 낯선 낱말에는 풀이를 달아 시인이 모르고 지나쳤던 오류를 바로잡았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할머니는 아흔 네 해 동안 짊어졌던 짐을 부리고 허리를 펴, 아 마을에 풀어놓았던 숨결을 구석구석 다 거둬들였다가 다시 이 작은 강변 마을에 골고루 풀었습니다.” 할머니의 삶이 어땠는지는 책의 마지막 구절, 살아 생전 할머니 말씀에 다 들어있다.

“얘야, 내가 죽으면 내 간을 꺼내 보거라. 내 간이 있는가 녹아부렀는가.” 동학과 일제와 남편을 앗아간 전쟁까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억척스럽게 살았던 할머니를 산에 묻고 돌아온 저녁, 해 저문 강변에서 시인은 그렇게 그리움에 젖는다.

그림은 붓에 먹을 듬뿍 묻혀 그려낸, 한국적 색채가 물씬한 수묵 채색화다. 첫 장면은 아늑한 강변 마을 풍경이다. 막 꽃망울이 터지는 이른 봄. 낮게 웅크린 집들이 어깨를 맞댄 위로 늙고 굽은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고, 하늘 멀리 옅은 봄빛이 부드럽게 퍼져있다.

색채를 아껴서 쓰고, 여백의 아름다움을 살린 얌전한 그림에 맑고 다사로운 기운이 스며있다. 마지막 장면, 점점이 노란 불빛이 흔들리는 강물 위로 그느슥하게 번지는 어둠을, 화가는 화면 가득 고운 팥죽 빛깔로 풀어놓았다. 그 부드러운 톤이 화자인 시인의 쓸쓸한 마음을 위로하는 듯 하다.

이 책은 우리네 전통 상례의 풍속첩이기도 하다. 임종의 순간부터 초혼-입관-운구-매장- 봉분 만들기까지 상례의 절차, 그 과정을 함께 치르는 마을 공동체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발인 전날 밤, 초상 마당에서 벌어지는 ‘빈 상여놀이’ 장면은 압권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울고 웃고 춤추고 노래하며 죽은 이의 명목을 빌고, 산 자의 설움을 달래던 이 풍속은 죽음조차 삶의 일부로 끌어안았던 순하고도 굳센 마음을 보여준다.

흔히 그림책은 아직 글자를 잘 못 읽는 꼬마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음을, 이 아름다운 그림책이 웅변한다. 볼수록 정이 가는 멋진 작품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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