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성시 서운면 ㈜신흥정밀은 비디오 데크, LCD TV 새시 등을 생산해 한 해 1,800억여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이다. 1968년 문을 연 이래 금형업계에서 잘 나가는 회사로 이름을 떨쳤지만 2003년 큰 위기를 맞았다.
국제 원자재가격 급등, 환율하락, 중국업체의 저가공세 등이 겹쳐 금형제품의 수익성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회사측은 고부가 가치를 올릴 수 있는 새로운 업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아이템은 물론 자금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속수무책이었다.
이 때 도움을 자처하고 나선 회사가 삼성전자이다. 신흥정밀은 삼성전자와 72년부터 관계를 맺고, TV 외관 및 백색가전 외관 등을 납품해온 협력업체였다. 삼성전자는 위기에 내몰린 신흥정밀측에 새로운 사업으로 레이저 프린터의 핵심부품인 LSU(Laser Scanning Unit)를 생산해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설비투자비 30억여원을 선뜻 지원했다.
삼성전자 LCD총괄 윤주인 과장은 “신흥정밀은 수 백개의 협력업체 중 삼성전자가 지속적으로 벌여온 다양한 경영 혁신 프로그램을 착실히 수행해온 몇 안 되는 기업으로, LSU 제품 양산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해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고 말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신흥정밀은 뛰어난 금형기술과 삼성전자로부터 받은 기술지원을 토대로 LSU 사출 원가를 40%이상 줄이는 데 성공했다. 현재 매달 20만개의 LSU를 생산, 삼성전자에 납품하고 있다. 이 수치는 삼성전자가 판매하는 프린터의 절반을 넘는다. LSU시장 진출 3년만에 신흥정밀이 삼성전자측에 가져다 준 원가절감액은 140억여원. 이런 공로로 이 회사 정순상 부회장은 지난 달 삼성그룹이 선정한 자랑스런 삼성인상 수상자가 됐다.
초일류 기업 삼성전자가 오늘의 자리에 오른 것은 수백 개의 협력업체들이 삼성전자의 글로벌 기업으로 체질개선을 할 수 있도록 함께 보조를 맞췄기 때문에 가능했다. 삼성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 40여명이 지난 해 말 ‘사랑받는 국민기업정착’을 위한 경영전략에서 협력업체의 경쟁력 강화가 그룹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상생경영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삼성의 상생경영에 대한 관심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삼성은 1990년부터 거래처, 납품업체, 하청업체라는 용어를 없애고, 협력업체라는 표현을 도입, 삼성가족이라는 인식을 심는데 노력했다. 또 협력업체의 지원과 육성을 위한 전담조직을 구성, 꾸준히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예외는 아니다. 삼성전자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중장기 계획을 세워 협력업체 자금지원, 현장지도, 교육지원에 모두 1조원을 지원하고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2004년은 협력업체 지원을 정착화하는 단계이며, 2005년 가속화단계, 올해는 정예화단계를 거쳐 내년부터는 예술화단계에 이른다는 목표이다.
삼성전자의 상생경영은 협력업체에 대한 단순한 지원이 아니다. 경쟁력을 갖춘 업체에 대해서는 삼성전자의 제조기술과 경영기법 등 다양한 노하우를 함께 전수하고 있다. 삼성전자내 공장부지까지 기꺼이 제공하기도 했다.
경기 수원시 매탄동 ㈜세화는 TV, 냉장고 등 백색가전 외관을 생산해 삼성전자에 납품해왔으나 2003년 수원공장의 백색가전공장이 광주로 이전하면서 사업포기의 위기에 내몰렸다. 삼성전자를 따라 광주로 내려간다면 관리의 이원화, 투자비 증가 등으로 회사의 경영이 크게 압박을 받을 것으로 우려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화는 삼성전자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광주 세탁기공장내 라인 부지를 삼성전자 광주공장 안에 무료로 내줄 테니 같이 광주로 내려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삼성전자로서도 세화측이 사업을 포기할 경우 현지에서 새로운 사출업체를 구해야 하는 등 적지 않은 어려움이 예상됐다. 세화는 삼성전자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투자비용과 관리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은 “초일류 기업으로 남기 위해서는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협력회사의 도움은 필수적”이라며 “앞으로도 혁신활동가속화, 연구개발역량강화, 정보통신 인프라 구축 등을 통해 협력회사와 동반 성장을 이끌겠다”고 밝혔다.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삼성, 협력업체 위해 1조2,000억 지원
삼성그룹은 초일류 기업에 걸맞게 협력업체와의 상생 협력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타기업을 앞선다. 삼성의 경우 주력 계열사들이 대부분 수출 중심 기업인 만큼 오래 전부터 ‘협력업체의 경쟁력이 곧 삼성의 경쟁력’이라는 기치 아래 협력업체의 경쟁력 강화를 지원해 오고 있다.
삼성은 이에 따라 지난해말 2010년까지 중소 협력업체와의 상생 협력에 총 1조2,000억원을 지원한다는 중장기 계획을 발표했다. 구체적인 지원 방안으로는 ▦국산화 개발 및 품질ㆍ생산성 향상을 위한 설비투자에 1조500억원 ▦협력회사 진단ㆍ개선을 위한 전문가 조직 운영에 1,080억원 ▦교육을 통한 협력업체 직원 육성에 320억원 등이다.
또한 ‘협력회사 지원센터’를 개설해 경영자 양성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삼성전자에서 2004년부터 하고 있는 ‘협력업체 지원 육성 프로그램’을 계열사로 확대해 협력업체에 대해 자금과 기술, 인력을 지원할 계획이다. 삼성은 계열사별로 품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협력업체에 무이자 또는 장기 분할상환 조건으로 시설 투자지원을 하고 있다.
특히 삼성은 7일 이건희 회장의 사재 8,000억원 헌납을 골자로 한 대국민 발표문에서 중소기업 및 협력업체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한 터여서 상생협력 지원 규모는 확대될 전망이다. 중소협력 업체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방안은 늦어도 내달이면 윤곽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 한 관계자는 “삼성은 그 동안 협력업체에 대한 시혜 차원이 아니라 자체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상생 협력을 해왔다”며 “조만간 중소 협력업체에 대한 실질적인 추가 지원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송영웅 기자 herosong@hk.co.kr
■ 삼성, 협력업체 2세에 경영 가르친다
삼성전자 구미공장 무선사업부에서 근무하는 김승철(35)씨는 입사 6개월차 계약직 사원이다. 언뜻 보면 늦깎이 신입사원쯤으로 알기 쉽지만, 그는 삼성전자의 협력업체로 리모컨, 스피커, 공기청정기를 만드는 ㈜삼진의 경영자 2세이다.
경기 안양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종업원 200여명에 연 4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건실한 중소기업. 중국과 멕시코에 현지 공장까지 둔 글로벌 기업이다. 연세대 수학과 석사출신인 그는 아버지 밑에서 이 회사에서 7년 동안 해외 마케팅 이사로 재직하며,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김씨가 돌연 삼성전자의 옷을 입은 것은 이 회사가 운영하는 미래경영자 양성교육 프로그램 때문이다. 김씨는 지난 해 초 삼성전자로부터 입사권유를 받았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김씨는 삼성전자의 선진화한 기업 운영 노하우를 배우고 싶어 흔쾌히 그 제의에 응했다.
미래경영자 양성은 삼성전자의 상생경영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실질적인 지원책이다. 삼성전자는 이를 위해 2004년부터 2008년까지 20억원을 들여 협력업체 2세 200여명을 교육시킬 계획이다. 계약직은 1년, 인턴사원은 5주 일정이며, 지금까지 50여명이 이 과정을 거쳤거나, 진행중이다.
김씨가 구미공장에 입사한 것은 지난 해 8월. 첫 5주 동안은 구매파트에서 업무를 배웠다. 이어 디자인, 개발부서를 거쳐 지금은 제조업장에 투입됐다. 제조분야의 일을 마치면 마케팅과 국내영업을 배우게 된다. 김씨와 함께 입사한 경영자 2세 출신 직원은 모두 13명. 연령층은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다양하며, 모두 대졸 신입사원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다.
김씨는 “사업장 교육과 함께 전문 강사로부터 업무와 관련된 강의를 수시로 받고 있다”며 “이론교육과 현장교육을 병행하니 업무의 이해도가 높다”고 말했다. 일을 배우는 과정에서 삼성전자의 업무 스타일이 자연스레 몸에 배는 것도 큰 수확이다.
김씨는 “특히 인사제도에서 직원들에 대한 평가와 보상이 객관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에 놀랐다”며 “여기서 배운 것 중 회사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아 기대된다”고 밝혔다.
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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