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지 않고서야 이럴 순 없다. 백만장자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또야?” 싶은데 첫사랑에, 게다가 불치병이라니. 두 연인은 노을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물뿌리기 장난을 하며, 비오는 날 우산 속에서 첫 키스도 한다. “아무 것도 못해줘서 미안하다” “바보, 이렇게 행복하게 해주고서” 같은 대사도 빠지지 않는다. 2006년의 영화 윤리로 견줘봐도 이건 너무했다.
그러나 한 치도 관객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이 상투성을 비판하는 것은 영화 ‘백만장자의 첫사랑’의 초점을 벗어난 것이다. 영화 ‘화산고’와 ‘늑대의 유혹’으로 청춘 로맨스 분야에서 장기를 보인 김태균 감독과 드라마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으로 신분상승 연애담의 달인이 된 김은숙 작가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 만무한 일.
그런데도 이들이 상투성의 굴레를 기꺼이 뒤집어 쓴 이유는 이 영화의 목적이 오로지 주연배우 현빈의 멋있음을 강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현빈이 멋지게 보이기 위해 그는 부자여야 하고, 유머러스한 동시에 터프해야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그의 순정을 증명하기 위해 여자는 불치병에 걸려줘야 한다.
지난해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통해 대한민국 여성들의 찬탄을 한 몸에 받았던 현빈의 스크린 데뷔작인 ‘백만장자…’는 학업에 뜻이 없는 안하무인의 재벌집 도련님 강재경(현빈)이 시골 소녀 최은환(이연희)과의 사랑을 통해 순화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호텔 재벌인 할아버지는 유일한 상속자인 고3 손자에게 유산을 남기면서 강원도 산골 학교로 전학 가 반드시 고교졸업장을 받으라는 조건을 건다.
버릇없는 도시 귀공자와 순박한 시골 학생들의 융화 과정이 요즘 코미디영화의 필수요소가 돼버린 강원도 사투리, 김은숙 작가 특유의 톡톡 튀는 대사 등과 함께 버무려지며 잔재미를 더한다. 한 편의 잘 만든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미도 즐겁다.
그러나 철저히 현빈의 매력을 소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기획 영화는 화면 속에서 연거푸 “오빠 멋지지?”를 묻는 듯한 현빈의 과도한 ‘젠 체’와 진지한 대사를 할 때면 유난히 도드라지는 ‘국어 책 낭독식 어조’로 인해 매력이 반감됐다.
특히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려대는 후반부의 멜로 모드는 제 아무리 현빈이라도 지루함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를 쓰면서도 정서의 리얼리티를 잃지 않았던 김은숙 작가의 장기가 발휘되지 않은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같은 악조건에도 불구, ‘백만장자…’의 흥행 기상도는 흐리지만은 않다. 어쨌거나 현빈은 영화 속에서 여전히 멋있다. 현빈이 극중 이연희의 손을 잡을 때 시사회장에서 터져나온 소녀들의 비명소리가 이를 증명한다. 9일 개봉. 12세.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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