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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피혐(避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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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피혐(避嫌)

입력
2006.02.0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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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료를 내지 않은 것은 맞지만 미납은 아닙니다.” “부동산을 많이 산 건 사실이지만 투기는 아닙니다.”

장관 내정자들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이런 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 처음에는 ‘침묵의 웅변’이나 ‘똑똑 바보’처럼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모순되는 어구를 나열하는 모순어법인가 싶었다. 웬걸, 자세히 들어보면 볼수록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호도하는 억지주장에 불과했다.

■곧 장관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걸핏하면 학생들 국어 교육에 아주 안 좋은 영향을 미칠 문장의 본보기를 과시하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조선 시대 공무원들은 적어도 단어를 왜곡해 가면서까지 자리에 집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피혐(避嫌)이라는 관행이 그 증거다. 피혐은 글자 그대로 혐의, 의심, 비난을 피한다는 말이다.

어떤 직책에 임명되거나 임무 수행 중에 자신에 대한 비판이 오르내리면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거론됐다는 사실 자체를 수치로 여겨 사직이나 교체를 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도무지 그게 왜 사직의 이유가 되는지 이해가 잘 안 가는 피혐이 수두룩하다. 피혐이 어찌나 심했는지 이익이“혐의를 받았으니 물러나야만 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아울러 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종이에 가득 써서 낸다. 외람되고 번거로운 일임에도 전혀 꺼리는 바가 없다”고 그 폐단을 지적했을 정도다.

성종 때 교육부 차관 격인 홍문관 부제학 유 진은 한 상소에 “하나뿐인 누이의 생활을 돌보지 않는다”는 내용이 오르자 “이는 필시 저를 가리킨 말입니다”라며 임금에게 죄를 달라고 청한다. 전에 같은 문제로 곤장 80대를 맞은 적이 있고 사실이 아닌데도 사표를 내는 정도도 아니고 대죄를 한 것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도산에 기거할 때 산 아래 국영 저수지가 있었다. 개인이 사사로이 고기를 잡거나 할 수 없는 시설이었다. 퇴계는 여름만 되면 주거를 계상으로 옮겼다.

혹시라도 고기를 잡아먹었다고 헐뜯는 사람이 있을까 저어해서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평생의 라이벌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어찌 그리 쪼잔하냐? 나 스스로 안 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을 혐의쩍어 하고 무엇을 피한단 말인가?”라고 평했다지만 퇴계의 몸가짐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런 퇴계가 ‘쪼잔하다’면 지금 청문회에 오른 두 내정자는 대범한 걸까, 아니면 무지막지한 걸까? 아니지, 삼사(三司)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탄핵할까 두려워 서둘러 강변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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