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변했네요.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아요.”
4대에 걸쳐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미국인 브루스 테일러(87)씨 가족이 66년 만에 고향인 서울을 찾았다. 지난달 31일 자신의 가족사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기 위해 방한한 테일러씨는 5일 중구 소공동 웨스틴 조선 호텔 근방을 돌아보며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이곳은 그의 부친인 알버트 테일러씨가 1910년대 말부터 1941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무역상을 경영하던 곳이다.
테일러씨는 1919년 2월 28일, 3ㆍ1 독립만세운동 하루 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당시 UPI 통신원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뒀다가 일본을 통해 미국으로 타전, 3ㆍ1운동이 세계적으로 보도되도록 했다. 이 일로 테일러 일가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다가 1941년 추방당했다.
테일러씨 일가가 한국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은 할아버지 조지 테일러씨가 평안북도 운산의 금광 개발에 뛰어든 1896년. 금광 엔지니어로 일하던 할아버지는 1908년 한국에서 사망해 현재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아버지 알버트 테일러씨도 1948년 미국에서 타계한 후 “내가 사랑한 땅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할아버지 곁에 묻혀 있다. 영화제작자인 테일러씨의 딸 제니퍼 테일러도 현재 테일러 일가의 서울 생활을 다룬 할머니의 자서전을 영화로 제작 중이어서 테일러 일가의 서울 사랑은 4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테일러씨는 이번에 방한하면서 1920년대 경성일보 사옥(서울시청 본관)과 원구단 모습과 고종황제 장례식 행렬 등을 찍은 사진 17점을 가져와 6일 서울시에 기증할 예정이다. 이 가운데 고종황제 장례식 사진은 상여꾼 복장, 외교사절 조문행렬 등을 근접 촬영해 국장(國葬)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서울시는 6일 테일러씨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고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행촌동 집과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문화재 등록을 추진할 방침이다.
테일러씨 일가의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나라’는 3월 1일 KBS를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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