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사망 소식은 처음에 귀향 소식처럼 들렸다. 이 위대한 인물은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나 보다 했고, 이런 생각은 죽음과 고향의 관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보통 고향은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또한 생의 막바지에 돌아가고 싶은 곳, 죽어서 안식을 찾는 곳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고향이 주는 안식이란 무엇일까.
●시대를 앞서간 백남준의 사망 소식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름은 인간이 죽어서 남기는 껍질이다. 지나간 삶의 모든 우여곡절을 감싸던 외피, 그것이 사람의 이름이다.
죽음과 관련된 풍습들, 장례의식 등은 호랑이 몸에서 가죽을 벗겨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우연으로 가득 찬 한 개인의 삶의 부피에서 이름을 떼어내어 보존하는 절차이다. 벗겨내지 않은 가죽은 호랑이의 몸과 함께 썩어 없어진다.
이름도 또한 망자(亡者)의 특수한 삶에서 분리되어 어떤 정신적 공간 속에 방부되고 안치되지 않는다면 그의 시신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다. 잊혀지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상징화된 이름을 통해 새로운 삶을 누린다는 뜻이다. 사람은 죽은 후에 남긴 그 이름에 실려 기억의 나라로, 특정한 이념적 질서 안으로 들어간다. 장례식은 현세의 주민등록부에 있던 이름을 정신의 나라로 옮기는 등기 이전과도 같다.
고향이 주는 위안감도 이 점에서부터 이해해야 한다. 고전적 의미의 고향은 가족이나 혈족이 있는 곳, 그들의 애도와 추모를 통해 이름이 기억되고 상징화되는 곳이다.
장례가 있고 나서 백남준의 유분(遺粉)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안치될 예정이라 한다. 본인은 20여 나라에 자신의 유분이 뿌려지길 희망했지만 유족은 형편상 한국과 독일, 뉴욕에만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남준에게 고향은 무엇이고 고향에 대해 백남준은 누구인가. 이 위대한 예술가는 영원한 이방인이기를 택한 것이 아닐까.
사실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백남준은 세계 어느 곳에서건 낯선 이방인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에게 돌아가는 그 모든 타이틀과 찬사는 현대 예술사의 흐름을 주도하던 선진국, 그 중에서도 극히 제한된 환경을 배경으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
백남준은 현재의 역사 속에 뛰어든 미래의 파편이었고, 그 파편이 효모처럼 작용하여 새로운 예술적 상상력이 부풀어나게 된 것은 첨단의 문화적 환경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선구적 예술가는 아직 낙후했던 한국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런 첨단의 환경에 대해서도 이방인이었다. 그는 시대를 쫓아가기보다는 시대가 자신을 쫓아오도록 만든 예술가였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미래 한국인
죽어서도 마찬가지다. 죽은 백남준은 한국으로 쫓아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쫓아오도록 손짓하고 있다. 나를 따라와 봐, 고향은 거기가 아니라 바로 여기야.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과 독일을 향해서도 그렇게 외치고 있다. 백남준은 장르를 뛰어넘는 종합예술가라지만, 그가 정작 종합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국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남준이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한국의 예술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 백남준은 각별한 계승의 작업을 통해 다시 탄생시켜야 할 미래의 인물일 뿐이다. 그와 우리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그가 우리 안으로 내면화되고 우리를 통해 다시 숨을 쉬거나 말을 이어갈 때야 태어날 미래완료 시제의 한국인인 것이다.
하지만 국적의 종합자 백남준이 우리를 통해 숨을 쉬고 말을 할 때 우리의 정신 또한 다시 태어나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고, 그런 한에서 그는 새로운 한국을 수태시킨 예술가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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