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화양동 건대입구역 근처 한 빌딩 지하에 자리잡은 클럽 M. 20여평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 예닐곱개가 놓여있다. 언뜻 보기엔 흔하디 흔한 카페지만,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손님들이 모두 ‘여자’고,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화려하게 차려 입었다. 뭔가 ‘튄다’는 느낌.
이 곳 ‘여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클럽 M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곳’이다. 그 방법이 특이해서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드러내놓고 취향을 즐기기에는 남의 시선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진실을 밝히면 이 곳 ’여자’들은 여자가 아니다. 예쁘게 치장한 남자다. 대박을 터뜨린 영화 ‘왕의 남자’ 덕에 어느 틈에 보통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진 ‘여장남자’다. 그러니까 이 남자들의 ‘또 다른 나’는 ‘여자인 자기’인 셈이다.
낯선 얼굴을 본 운영자 홍모(29)씨가 기자에게 맥주 몇 잔을 권했다. 취기도 올랐겠다 한번 그들처럼 해보기로 했다. 본격적인 ‘업’(옷 갈아입기)에 도전했다.
업(up)이란 ‘차려입고 화장한다’는 영어 표현(dress up, make-up)의 줄임말이다. 화장, 속옷, 겉옷을 제대로 갖춘 ‘풀업’(full up)이 있고, 일부는 생략한 ‘부분 업’이 있다.
종업원 조모(28)씨의 안내를 받아 가게 안쪽의 ‘분장실’로 들어갔다. 한쪽 벽면에 100여벌의 여성복이 걸려있고, 반대편 벽에는 단골 손님의 사물함 20여개가 놓여있다.
여장의 기본은 속옷. 브래지어를 입고 팬티스타킹 위에 거들을 덧입어 하반신 라인을 잡아준다. 치마를 입고, 비드 장식이 달린 웃옷을 걸쳤다.
이어서 화장을 할 차례. 머리띠로 머리를 올려 매고 거울 앞에 앉으니 자신을 ‘스태프’라고 소개한 여장남자가 다가왔다. 기초화장, 볼 터치, 눈썹 그리기에 이어 속눈썹도 붙인다. 갈색 가발도 눌러썼다.
거울을 보니 한 낯선 여자가 나를 바라본다. 여자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이면 족했다.
이곳에서 여장남자는 크로스 드레서(cross dresser)의 약자인 ‘시디’(CD)로 불린다. 운영자 홍씨는 “이곳은 이반(일반인과 다르다는 뜻으로 흔히 동성애자를 일컫는다)들이 모이는 게이바와 다르다”고 말했다. “낚시나 등산처럼 여장을 취미로 즐길 뿐인데 비정상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고 푸념했다.
여장남자들이 즐기는 모습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차나 술을 마시면서 수다를 떨거나 반주기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일년에 서너번씩 정기모임이 열리면 춤이나 노래 같은 공연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에서 의심하는 것처럼 파트너 알선이나 퇴폐 행위는 전혀 없다고 했다.
여성으로 치장하는데 따로 돈을 받지는 않는다. 대신 술 값이 다른 곳 보다 30~40% 정도 비싼 편이다. 옷과 화장품은 클럽에 비치된 것을 빌리거나 사 쓸 수 있지만 경력이 2~3년 이상 된 사람들은 자기 것을 직접 장만한다. 옷은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화장품은 인터넷을 통해 주로 구입한다고 한다.
영화 탓인지 최근 인터넷 포털에 개설된 여장남자 카페 30여개 중 10여개 이상이 지난해 12월 이후 생겨났다. 3,000여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다. 현재 서울에는 클럽 M을 비롯, 서너 군데의 여장남자 클럽이 운영중이다.
이들은 왜 여장을 할까. 시디 7년차라는 이모(33)씨는 “가끔 남자라는 사실이 성적 정체성의 범주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덧씌워진 의무와 속박의 덩어리로 느껴진다”며 “여장을 하면 자유롭고 아름다운 또 다른 나로 태어난다”고 말했다.
S대 재학생인 정모(23)씨는 “모든 남성이 여성의 X염색체를 갖고 있듯, 내재된 여성성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게 아닐까”라고 되물었다.
정씨는 “여장을 했을 때 만족스러운 점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내 안의 나를 드러내고 발견한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심리학과 권정혜 교수는 “남성이 여장을 취미로 삼을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여장남자 상당수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이나 혼란을 겪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철환 기자 plomat@hk.co.kr
■ 신드롬된 의미는/ "남성중심적 문화코드 무너져"
여장남자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사회가 여성화하거나 탈 남성화하는 트렌드, 혹은 ‘메트로 섹슈얼’의 유행이 동성애적 코드로 연결되는 분위기에서 파생된 병적 현상이 아니란 얘기다.
굳이 영화 ‘왕의 남자’를 떠올리지 않아도 여장남자의 모티브는 다양한 상상력으로 우리 문화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록 뮤지컬 ‘헤드윅’, 영화 ‘M. 버터플라이’,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에서 여장남자는 사회에 저항하는 젊은 감성의 모습으로, 적국의 남성을 파멸로 몰아가는 스파이로, 아이들 곁에 남으려는 아버지로 등장한다.
여자의 출연이 금지되는 일본 전통극 가부키에서는 여성 역할을 하는 여장남자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글램 록’의 유행과 80년대 영국 팝 그룹 ‘컬쳐 클럽’의 리더 보이 조지 역시 여장남자의 이미지를 차용해 시선을 끌었다.
여장남자는 ‘축제’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전까지 ‘문선대’의 위문 공연에서 춤과 노래를 곁들인 여장남자의 무대는 공연장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필수 코스였다.
코미디의 영역에서 여장남자는 하나의 장르다. KBS의 간판 코미디프로 ‘개그콘서트’는 ‘황마담’을 시작으로 ‘제니퍼’ ‘스테파니’까지 여장남자를 대표적 캐릭터로 이용해 왔다.
대체로 여장남자는 대체로 코미디의 해학적 요소나 복수 같은 비극적 줄거리의 극적 효과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미국의 여류 사진작가 다이앤 아버스는 여장남자를 예술 사진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여장남자는 그에게 억압적인 문명과 개인적 에로티시즘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사례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장남자는 어떤 의미일까. 한양대 문화콘텐트학과 박기수 교수는 “여장남자의 유행은 미디어나 기업들에 의해 조장되는 측면이 있지만,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적 문화 코드가 무너지고 개개인의 취향이 다양화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정철환 기자 ploma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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